2월 ‘국민훈장 모란장’ 받아

30년간 ‘최장·최고’ 3만여 시간 동시통역

88올림픽·세계태권도대회서 맹활약

이해영 통역 자원봉사자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은 ‘봉사왕’ 이해영씨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듣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24.03.12.
이해영 통역 자원봉사자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은 ‘봉사왕’ 이해영씨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듣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24.03.12.

[천지일보=박혜옥 기자] “통역 봉사활동은 저의 천직입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이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통역봉사 세계 기네스북 등재’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난 2007년, 30년간 3만 4000여 시간이라는 ‘최장·최고 시간’의 통역 봉사활동으로 세계 기네스협회 인증을 받아 기네스북에 등재된 이해영(75)씨다.

◆‘통역 봉사활동’ 현재 진행 중

그는 통역봉사를 통한 국위선양을 인정받아 국무총리 표창과 대통령 표창,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등 정부와 민간단체로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당시 많은 매스컴은 그를 주목했고 ‘봉사왕’ ‘영어‧일본어‧불어 등 다국어 언어 가능자’ 등 그의 이야기를 TOP 기사로 실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4년 현재,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 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일흔이 훌쩍 넘은 그였지만 인터뷰 내내 생기 있는 눈빛에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2007년 당시 그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통역봉사를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통역자원봉사로 일하고 있었다. 50년 가까운 세월이다.

이씨는 “경기도자원봉사센터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수원화성, 에버랜드 등에서 관광 가이드를 비롯해 통역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지난 2월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이 내려졌다. 국민훈장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 또한 한국에 이런 분이 있었냐며 격려를 해줬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자원봉사는 웬만해선 하기 힘들고, 하더라도 꾸준히 지속하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한평생을 할 수 있는 걸까.

“제가 통역봉사를 꾸준히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과 배려 덕분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인물로 정계에서 알아주는 분이셨습니다. 제 나이 3살 때부터 아버지, 어머님 손에 이끌려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나누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씨는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이 그립다”며 아버지(이대호씨), 어머니(최성환씨)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이씨는 과거 매년 세계에서 열리는 자원봉사대회에서 17번이나 1등을 한 기록이 있다면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전했다.

“한국, 일본, 미국, 필리핀 등 세계에서 자원봉사대회가 열리면 어머니께서는 항상 한국에서 김치, 된장 등을 한아름 싸서 오셨어요. 공항에서 반입 금지로 걸리게 되는 날에는 ‘우리 아들 이거 먹고 대회에 나가야 한다’며 사정도 하시곤 하셨어요. 저희 어머니는 아들의 건강상태 등을 꼼꼼히 체크해주시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이른바 매니저 역할을 해주셨죠.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자원봉사는 일종의 집안 내력이자 가훈이다.

“선조들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고,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남긴 유언도 ‘너희들이 굶더라도 없는 사람을 도와줘라’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역시 제게 항상 같은 가르침을 주셨죠. 그 가르침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어요.”

◆ “통역 봉사활동은 나의 천직”

이씨는 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불어 등 다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어떻게 그는 다국어 능력 소유자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이씨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유엔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외국인 이웃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어를 터득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7년 동안 국제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를 익혔다.

한국인은 이씨 혼자였지만 명석함과 총명함으로 반장을 여러 차례 맡기도 했다. 이후 국내로 들어와 단국대학교에서 기계체조를 전공했다.

30대 초반에는 아내와 함께 이민을 갔다. 당시 미국 일리노이 주지사이던 친구로부터 “한인사회와 의사소통이 필요하니 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한인과 미국인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됐다.

“의사소통이 안 돼 답답해하던 교민들이 저로 인해 소통이 됐죠. 또한 한국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제대로 설명해 줬어요. 그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돌았죠. 그래서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이씨는 교민들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자연스럽게 통역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주며 보람을 느낀 그는 미국에서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마련해 봉사활동을 이어 나갔다.

몇 년 후인 1988년 그는 정부로부터 서울 88올림픽 통역 봉사 요청을 받고 혼자 귀국하게 됐다. 88올림픽 통역 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대전엑스포, 2002 한일월드컵,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 2005년 세계태권도대회 등 대형 국제행사 자원봉사에 나서며 지금까지 한국에서 자원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미국에 있는 아내와 딸도 “국위선양하라”며 그의 길을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오랜 시간 기러기 아빠로 생활하고 있는 그에게 외롭지 않냐고 물으니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빠서 외로울 틈이 없다”고 답했다.

오랜 시간 통역 자원봉사로 일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태권도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해외에서 온 대통령 딸의 통역 봉사활동을 했을 때다. “대통령 딸이 수행원 수십명과 함께 왔는데 제가 2달 동안 그 대통령 딸과 먹고 자고 했어요. 정이 많이 들었지요.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고 귀국했어요.”

“용인 민속촌에서 일본인 관광객과 인연이 돼 파전에 막걸리를 먹은 적이 있어요. 다음날 제가 숙취 해소에 좋은 콩나물국을 끓여줬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정(情)을 느낀 일본 친구들이 한국에 오면 저에게 연락을 한답니다.”

이씨에게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을 물었다.

그는 “마음을 비워야 하고 욕심이 없어야 한다”며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인생은 지금도 봉사로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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