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케냐·튀르키예 페미사이드 규탄 대규모 시위
“여성은 자유·평등 원하는데 男 받아들이지 못해”
2022년 페미사이드 9만건… 최근 20년 중 최다
세계은행 “필요한 법적 보호 받는 女 세계 1/3”
안전업체, 女 여행객에 “오스트리아·印 등 주의”

[마닐라=AP/뉴시스] 8일(현지시각)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시위 참가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날로,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 여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에서 시작됐다. 2024.03.08.
[마닐라=AP/뉴시스] 8일(현지시각)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시위 참가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날로,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 여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에서 시작됐다. 2024.03.08.

[천지일보=이솜 기자] 지난 1월 14일 케냐 나이로비의 에어비앤비에서 대학생 리타 웨니(20, 여)가 숨진 채 발견됐다. 부검을 담당한 정부 병리학자는 자신이 일하는 중에 이번처럼 끔찍한 살인은 목격한 적이 없다고 기록에 남겼다.

웨니는 2024년 1월 케냐에서 살해된 31명의 여성 중 한 명이다. 아프리카 데이터 허브의 분석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4년까지 케냐에서 약 500명의 여성이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되는 것을 통칭.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성 기반 폭력) 의 희생양이 됐다. 다만 모든 사건이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수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7일에는 튀르키예에서 하루 동안 여성 7명이 자신의 이전 또는 현재 파트너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위 윌 스톱 페미사이드(WWSF)’에 따르면 지난해 튀르키예에서 최소 403명의 여성이 살해당했으며, 가해자 대부분은 현재 또는 전 배우자나 가까운 남성이었다. 올해 현재까지 튀르키예에서 살해된 여성은 2월 27일 7명을 포함해 71명으로, 이는 이 나라에서 지금껏 발생한 살해 건수 중 가장 많은 수치다.

피단 아타셀림 WWSF 사무총장은 무슬림이 대다수인 튀르키예의 가부장적 전통과 문제 있는 관계를 떠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타셀림 사무총장은 8일 AP통신에 “튀르키예 여성들은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기를 원한다”며 “남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성의 발전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는 2011년에 여성 폭력 방지에 관한 유럽 조약(이스탄불 협약)에 최초로 서명하고 비준한 국가다. 그러나 10년 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조약에서 탈퇴하면서 시위를 촉발시켰다.

양국에서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페미사이드를 규탄하는 항의 시위가 열렸다.

‘여자를 죽이지 말라’는 많은 캠페인과 발전에도 세계 곳곳에서 페미사이드 문제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국제여성의날인 8일 지구촌에서는 전 세계 많은 도시에서 여성들이 다시 집회를 열고 “우리를 그만 죽여라(Stop killing us)”는 구호를 외쳤다.

ⓒ천지일보 2024.03.10.
ⓒ천지일보 2024.03.10.

◆여성 살인의 55%는 집에서 발생

작년 11월 유엔 마약 및 범죄 사무소(UNODC)와 유엔 여성(UN Women)의 ‘여성과 소녀의 성별 관련 살인’ 보고서는 “전 세계 모든 지역의 여성이 성 기반 폭력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적으로 약 8만 9000명의 여성과 소녀가 살해당했으며, 이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높은 연간 수치다. 전 세계 살인 사건은 2021년에 급증한 후 2022년에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여성 살인 사건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살인 사건으로 사망하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지만(2022년 살인 사건 사망자의 80%가 남성) 가정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2022년에 전 세계적으로 약 4만 8800명의 여성과 소녀가 친밀한 파트너나 다른 가족 구성원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는 전체 여성 살인 사건의 55%를 차지하며, 평균적으로 매일 133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들이 자신의 집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성 대상 살인 사건이 가정에서 발생하는 경우는 12%다.

여성에 대한 살인의 대부분은 성별에 따른 동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여성 살인 사건 10건 중 약 4건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정보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실제 페미사이드 규모는 훨씬 더 클 수 있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대륙별로는 아프리카에서 2022년 페미사이드 피해자 2만명이 발생하면서 2013년 이후 처음으로 아시아를 제치고 가장 많은 피해자가 있는 지역이 됐다. 아프리카는 여성 인구 규모에 비해 가장 많은 희생자(10만명당 2.8명)가 발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아시아는 같은 해 1만 8400명의 여성 또는 소녀가 살해돼 2위에 올랐고, 미주는 여성 인구 10만명당 1.5명의 여성 또는 소녀가 살해돼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보였다.

유엔은 성 관련 살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별 관련 요인에 근거해 의도적으로 자행된 살인.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자격과 특권에 대한 이데올로기, 남성성에 관한 사회적 규범, 남성의 통제·권력을 주장하거나 성 역할을 강요하거나 용납할 수 없는 여성 행동으로 간주된 것을 예방, 억제, 처벌해야 할 필요성 등이 포함된다.

8일(현지시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성폭력 반대 시위에서 여성들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출처: 뉴시스)
8일(현지시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성폭력 반대 시위에서 여성들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출처: 뉴시스)

◆“페미사이드는 예방할 수 있는 죽음”

숫자상으로도 놀랄만한 상황이지만 이런 수치는 암울한 현실의 단편일 뿐이다. 국가별 형사 사법 기록 및 수사 관행의 차이로 인해 페미사이드 피해자의 상당수(약 40%)가 성별 관련 살인으로 분류되지 않아 유엔 보고서에서 파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살인 사건이 일단 페미사이드로 분류되기도 어려울뿐더러 분류된다고 해도 피해자가 사법적으로 보호받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지난 4일 세계은행(WB)의 ‘여성, 비즈니스와 법 2024’ 보고서는 조사 대상 190개국에서 가정 폭력, 성희롱, 조혼, 페미사이드에 대해 필요한 법적 보호를 받는 여성이 약 3분에 1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문자상으로 있는 법적 보호와 실제 적용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튀르키예 활동가들은 자국의 법원이 후회한다고 하거나,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거나 재판 중에 선행을 보이는 남성 가해자에게 관대하다고 주장한다.

접근 금지 명령 기간이 너무 짧고 이를 위반한 가해자가 구금되지 않아 여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아타셀림 사무총장은 “페미사이드 사건은 모두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51개국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 금지돼 있지만 공공장소에서의 성희롱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국가는 40개국에 불과하다.

보고서는 세계에서 여성이 누리는 권리가 남성의 약 3분의 2(64.2%)에 그치는 등 성별에 따른 격차가 여전히 크다고 평가했다. 또 아무리 부유한 국가라도 진정한 평등 기회를 제공하는 국가는 없다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인디밋 길은 “여성이 직장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데 어떻게 직장에서 번영을 기대할 수 있겠나”라고 꼬집었다.

8일(현지시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위가 열린 가운데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뉴시스)
8일(현지시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위가 열린 가운데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뉴시스)

◆여행 전 각국 여성 인권 상황 파악해야

가정에서의 페미사이드 비율이 높긴 하지만 여성이 집 밖에서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글로벌 여행 위험 관리업체 힐릭스가 올해 세계여성의 날을 앞둔 7일 발표한 ‘여성의 권리와 안전’ 연구에 따르면 세계 전반적으로 여성의 안전 위험은 부정적 측면이 우세했다.

힐릭스는 오스트리아, 인도, 소말리아, 이탈리아 등의 국가에서 페미사이드가 증가하고 있어 여성 여행객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초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24시간 동안 5명의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인도에서는 여성이 파트너나 가족에 의해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아 페미사이드가 전염병처럼 여겨지고 있다.

소말리아에서는 페미사이드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2023년에 파트너에게 살해되거나 무작위 공격으로 사망한 페미사이드 희생자가 약 120명에 달한다.

미국에서는 올해 여성의 생식권을 침해하고 여성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법안이 제안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앨라배마 대법원이 동결 배아를 자녀로 간주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많은 주에서 여성 생식 치료가 널리 제공되지 않아 여성들이 계속해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힐릭스는 전했다.

엘살바도르는 낙태를 완전히 범죄화했으며 현재 세계에서 페미사이드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는 여성은 항상 경계심을 갖고 단체로 이동해야 한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레바논 등 중동 및 북아프리카(MENA) 국가에서는 여전히 많은 여성이 집을 나가려면 남성 또는 남성이 동행하거나 허가가 필요하는 등 여성의 이동권이 제한되고 있다. 이 지역의 일부 국가에서는 여성의 여권 발급이나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란은 히잡 의무 착용법을 어기는 여성과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해 처벌 조치를 계속 시행하고 있다. 여성 여행자는 이란에서 시간을 보낼 경우 이러한 법률을 숙지하고 그에 따라 준수해야 한다.

또 힐릭스는 최근 영국 내에서 여성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 여행자는 특히 밤에 혼자 여행하는 경우 주의해야 한다.

호주는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으며 여성에게 안전한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브라질 대법원은 낙태 비범죄화에 한 걸음 더 다가섰으며, 힐릭스는 이를 “브라질 내 평등과 형평성 달성을 위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움직임”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연합(EU)은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한 조약 비준을 추진했다. 이 조약은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을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한 국제 법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힐릭스는 이를 통해 여성에게 더 안전한 근무 환경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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