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태산은 중국인에게 영혼의 고향이다. 역대 제왕은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봉선(封禪)을 거행했고, 수많은 사람들은 성지로 여겨 평생에 한 번이라고 오르려고 했다. 입구에 있는 대묘(岱廟)는 태산신인 동악대제를 모신 곳이다. 병령궁(炳靈宮) 또는 동궁(東宮)이라 불렀던 한백원(漢柏院)은 배천문(配天門) 동남쪽에 있다. 이곳에는 한무제가 봉선을 하러 왔다가 심었다는 잣나무 5그루가 있다. 한백은 청의 건륭시대까지 6그루가 있었는데, 1그루는 고사하고 5그루만 남았다가 최근에 1그루도 고사했다. 남은 4그루도 너무 늙어서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으면 곧 고사할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가지에 푸른 솔잎이 무성해 애잔한 느낌을 준다. 친구 노악(魯岳)은 6그루 가운데 하나는 고사한 것이 분명하지만, 나중에 죽은 하나는 고사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몰지각한 인간에게 살해됐다고 한다.

1929년, 군벌의 혼전이 벌어졌을 때 국민당 산동주석 손량성(孫良誠)이 태안에 주둔했다. 그는 대묘를 본부로 삼고 천황전을 마구간으로 삼았다. 이 무지한 인간은 마구간을 넓히려고 벽화에 구멍을 뚫고 사다리를 걸친 다음 구유를 설치했다. 숭고한 공간은 말이 치지하고 말았다. 적미군(赤眉軍)이 한백을 자르려고 했다가 칼을 대자마자 나무에서 피가 줄줄 흘러서 다시는 손도 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확인해보니 그때까지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떤 졸병이 직접 확인하겠다고 설쳤다. 도사가 말리자 병사는 오히려 도사의 두 귀를 잡고 욕을 퍼부으며 칼까지 휘두르다가 가버렸다. 도사가 그 사실을 손량성에게 보고했다. 손량성은 이미 천황전을 마구간으로 만든 주제에 나무를 보호했다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그는 도사에게 자신이 얼마나 문물을 아끼는지 설명한 후에, 못된 짓을 저지르려고 했던 졸병을 찾아 직접 징벌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손량성은 부대를 집합시키고 일장 훈시를 한 후에 도사에게 못된 짓을 한 놈을 직접 찾으라고 했다. 손량성은 끌려나온 졸병을 직접 매질했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못을 뉘우치지만 소인배는 오히려 앙심을 품는다. 졸병은 한백에게 화풀이했다. 이 녀석은 어느 날 밤에 솜뭉치에 기름을 부어 그것으로 한백에 뚫린 구멍을 메웠다.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2천년이 넘은 나무가 몽땅 소실된 후였다. 노악은 이 이야기를 태산 일대에서 수집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국민당의 악행을 선전하기 위해 조작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다. 한백은 태산팔경 가운데 하나이다. 원(元)의 왕혁(王奕)은 당시 한백의 처량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부박심고세월심(腑剝心枯歲月深), 손지이해작룡음(孫枝已解作龍吟).
열풍취기고고운(烈風吹起孤高韻), 유작봉두양보음(猶作峰頭梁甫音).
장부가 튀어나오고 심장이 메말랐으니 세월은 깊었는데,
어린 가지가 이미 헤치고 나와 용처럼 소리를 지르네.
매서운 바람 불면 고고한 소리가 나는데,
산봉우리에서 나는 양보음과 같구나.

양보음은 제갈량이 울분을 달래며 불렀다는 노래이다. 대묘에서 오랜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한백이다. 사람들은 이 잣나무를 원숭이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 같다느니, 학이 날개를 펼친 것과 같다느니, 매가 먹을 것을 다투는 것과 같다느니, 거대한 손이 하늘을 떠받치는 것과 같다느니, 규룡이 용트림을 하는 것과 같다느니 떠들지만, 나는 이 나무에서 6남매를 기르다가 늙어버린 내 부모님의 모습을 본다. 추석에도 부모님께 못한 나는 한백에게 화풀이한 졸병보다도 못하다. 노인은 살아있는 자체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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