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방관승은 안휘성 동성(桐城) 출신으로 자를 하곡(遐谷), 호를 문정(問亭) 또는 의전(宜田)이라 했다. 조부 방등역(方登嶧)은 공부주사를 역임했다. 부친 방식제(方式濟)는 강희 48년(1709)에 진사가 되어 내각중서를 역임했다. 강희 50년(1711), 한림원편수 대명세(戴名世)가 ‘남산집(南山集)’에서 남명(南明) 35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가 독찰원좌도어사 조신교(趙申喬)에게 탄핵을 받아 대역죄로 처형됐다. 대명세가 방관승의 증조부 방효표(方孝標)가 지은 항청(抗淸)에 관한 주장(奏章)을 소개했기 때문에 조부와 부친이 흑룡강으로 유배됐다. 어린 방관승과 형은 남경의 청량사에 맡겨졌다. 형제는 수천 리를 걸어서 흑룡강과 남경을 오갔다.

어느 해 방관승이 홀로 조부와 부친을 찾아 흑룡강으로 갔다. 마침 항주인 심정방(沈廷芳)과 해남인 진표(陳鑣)가 과거를 보러 북경을 향하다가 어린 방관승이 수레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옷은 남루하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우뚝한 이마와 단정한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아보였다.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함께 수레를 타고 가기로 했다. 문제는 수레가 너무 좁아서 두 사람밖에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30리씩 걷고 두 사람은 수레를 타기로 했다. 헤어질 때 두 사람은 방관승에게 새로운 옷과 전립(氈笠)을 주었다. 20년 후, 직예 총독이 된 방관승은 산동 청도에 있던 심정방과 운남지부로 있던 진표를 초대해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이들의 우정을 ‘거립지교’라고 한다. 작은 영리에도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보통 사람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두터운 인간관계였다.

조부와 부친이 흑룡강에서 병으로 사망한 후 살길을 찾아 북경으로 간 방관승은 측자점을 쳐주며 생활했다. 우연한 기회에 평군왕 복팽(福彭)을 만나 그의 막료가 됐다. 옹정 10년(1732), 복평을 따라 중가르로 출정했다가 내각중서로 들어갔다. 건륭초기에 군기처로 들어가 군기장경, 이부낭중을 거쳐 1742년에 직예안찰사로 승진했다. 두 차례 잠시 섬감(陝甘)총독서리를 맡은 것을 제외하고 20년 동안 직예총독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직예총독으로 재직할 때 팔기(八旗)의 토지를 측량하게 됐는데 몇 년이 지나도 정확한 성과가 없었다. 어사 범정해(范廷楷)와 임옥(林玉) 등이 방관승을 탄핵했다. 방관승은 책상물림인 언관들이 고담준론만 알고 실제의 정무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해 그들의 예기를 꺾을 하나의 계책을 떠올렸다. 방관승은 일단 사죄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범정해와 임옥이 강직하고 재능을 갖춘 인재라고 칭하고 그들을 직예로 파견해 자신을 돕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도 윤허했다. 두 사람이 부임하자, 방관승은 정중하게 대접하면서 엄청난 일거리를 그들에게 줬다. 팔기의 토지는 대부분 왕공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분명하게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치를 근거로 열심히 논쟁을 펼치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도저히 처리하기가 곤란한 것이 자주 발생했다. 그들이 비로소 사죄하자, 방관승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지도만으로 빨리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지방관에게는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네들이 하고 있는 일을 황상께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중지할 수는 없다. 좀 더 노력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방관승은 정식으로 관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32세부터 신속하게 승진해 종7품 내각중서에서 종1품 직예총독이 됐다. 건륭 13년(1748), 절강순무로 임명돼 방파제 건설현장을 시찰했다. 엄청난 모래가 쌓이자 그것을 이용해 35만무를 간척하고 빈민들에게 경작지를 마련해줬다. 직예총독으로 승진한 그는 치수사업에 성공해 건륭제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방관승은 20년이나 직예총독을 연임했다. 건륭 28년(1763), 천진에 물이 차자 방관승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면직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용서했지만 어사 길몽웅(吉夢熊), 주속경(朱續經)이 부하를 비호하는 불법행위를 범했다고 탄핵했다. 건륭제가 직접 방관승을 위해 변론했다. 건륭 33년(1768), 방관승은 학질에 걸려 향년 71세를 일기로 임지에서 사망했다. 시호는 각민(恪敏)이다. 가난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평생 성실했던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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