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김범우 역관 집 강학(김태 교수 그림, 명동대성당 소장) ⓒ천지일보 2023.11.30.
김범우 역관 집 강학(김태 교수 그림, 명동대성당 소장) ⓒ천지일보 2023.11.30.

◆ 서학서의 전래

서학(西學)은 임진왜란 이후 1600년대 초부터 청국으로부터 들어온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어이없이 겪은 임진 병자 두 전란의 참혹함은 주자 성리학적인 조선의 체제와 사상, 문명 전반에 한계를 드러내었다. 어느 사이에 조선은 외부의 위협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위협을 알고도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병든 사회가 되어 있었다.

사회 여기저기서 새로운 조선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런 움직임 중의 하나가 외국, 서양의 지식과 문명에 관심을 넓히는 지식인들의 움직임이었다. 일부 뛰어난 지식인들이 감옥 같은 주자 성리학의 높은 사상적 울타리 너머의 더 넓은 세상이 주는 빛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학은 누가 전파한 것이 아니라, 우주와 사물의 원리에 관심이 많았던 조선 지식인들이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스스로 찾아서 구하여 받아들인 서양문명이었다. 서학은 처음 서양으로부터 전해진 지식에서 점차 천주교 신앙을 포괄하는 말로 나아갔고, 천주교가 일반 민중들에게로 퍼져나가면서 서학은 천주교 서적과 지식을 뜻하는 말로 좁혀져 갔다.

조선 사신들은 북경에서 청국의 지식인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고, 청국의 서책과 그림, 각종 신기한 문명기구 등을 수집하여 국내로 들여왔다. 이때에 북경의 서양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하며 한문으로 된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과 기구는 물론, 천주교 교리서들도 접하고 국내로 반입했다.

학문의 나라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혔던 까닭에 한문 서학서(西學書)를 읽는 데 어려움이 크게 없었고 조선의 현실 개혁에 대한 관심과 외국 문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서학서를 탐독했다.

그런 지식인 가운데

실학자 이익의 제자 이벽(李檗, 1754∼1785). 북경 사신을 통해 들어온 서학서를 접하게 됐다. ⓒ천지일보 2023.11.30.
실학자 이익의 제자 이벽(李檗, 1754∼1785). 북경 사신을 통해 들어온 서학서를 접하게 됐다. ⓒ천지일보 2023.11.30.

이 있었다. 그는 실학자 이익(李瀷)의 제자로서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 뛰어난 인물들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북경 사신을 통해 들어온 서학서를 접하게 되었다.

“친구가 보내준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그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앉았다.(달레,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344)”

조선 지식인 사회에 서학서들이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1700년대 후반에 오면 저명한 벼슬아치나 큰 유학자들 중에 서학서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이를 보기를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나 불도(佛道)의 책처럼 여겼고, 서재에 꽂아 두고 완상하는 책으로 갖추어 두었다.(안정복, <천학고(天學考)>, <순암선생 문집(順菴先生 文集)> 권 17)

이벽은 이러한 서학서 연구를 바탕으로 1777(정조 1)년 권철신·정약전(丁若銓) 등 절친한 학자들과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교하기 30년 전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독자적으로 학습하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한문 서학서 원본을 소장하려면 북경에서 직접 구입해야 했으므로 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었다. 그 다음 방법으로는 한문 서학서를 빌려 베껴서 소장하는 방법이었다.

초기 천주교 지도자로서, 서울 명동에서 있었던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 구성원이었던 권일신은 1790년대 이전에 50여 권의 베껴 쓴 천주교리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성경직해'(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3.11.30.
'성경직해'(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3.11.30.

◆ 한글 서학서

183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매우 놀랐다. 천주교가 전파되는 데 한글의 우수성이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거의 모든 천주교인들은 알파벳식 글자로 된 그들의 말을 읽고 쓸 줄 아는데, 그것은 어린 아이들도 매우 빨리 배운다.(달레, 위의 책, p.13)”

그 반세기 전인 1780년대 들어와 자생적인 천주교가 설립되고 민중 속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일반 민중들은 한문 서학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이들 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한글로 번역된 서학서들이 나오자 민중 속으로 천주교가 더욱 급속히 퍼져 나가게 되었다. 1787년경에 이르면 한글로 번역된 서학서들이 퍼져나가 충청도의 경우 집집마다 외우고 전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부녀자나 어린이들 손에도 한글 서학서가 전해졌다. 다음의 사료에서 그러한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볼 수 있다.

“작년 봄(1787) 봄과 올(1788) 여름에 충청도 일대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외우고 전하기에 이르러서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등출(謄出: 베껴서 간행하다)해서 아래로는 부녀자나 아이들에까지 이르렀다.(李圭景, <척사교판증설(斥邪敎辦證說)>,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하, p.705 내용 중 진사 홍낙안(洪樂安)의 대책문에서)”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농부와 무지한 시골 아낙네라 할지라도 그 책을 언문으로 베껴 신명처럼 받들면서 혹은 일을 그만두고서는 외우고 익혀서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데 이르렀습니다.(<승정원일기> 87, 정조 12년(1788) 8월 2일, p.655)”

'성경직해'(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3.11.30.
'성경직해'(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3.11.30.

당시에 번역된 대표적인 서학서는 <성경직해(聖經直解)>였는데 1636년 북경에서 초간된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디아스(Diaz)가 쓴 <성경직해>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천주교 미사 때 주로 읽는 4복음서를 번역한 것으로 천주교 순교자 중 한 사람인 최창현(崔昌顯, 1759~1801)이 번역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 당했다. 그가 번역한 <성경직해>에는 4복음서의 약 30%가 번역되어 실렸다. 최창현과 함께 참수된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천주교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여 보급했고, 당시까지 전해진 한문 서학서를 참고하여 <성교전서(聖敎全書)> 편찬을 계획하기도 했다.

천주교가 민중 속으로 퍼져나가면서 한글 서학서의 요구가 더 커졌다. 한글 서학서를 보급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번역된 서학서를 베껴 쓰는 필사였다. 그리하여 점차 한글 서학서를 베껴서 자신이 소장하거나 주변에 배포하는 일이 성행했다.

청주의 김사집은 “열심히 글을 배워 과거에 급제할 만한 학문을 닦았었다. 글씨를 잘 쓰는 그는 천주교 서적을 많이 베껴 책을 살 수 없는 교우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책들을 거저 주었다.” “배 아우구스피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1년 동안 뱃사공 노릇을 하면서 교우들을 위하여 종교서적을 베끼는 일을 하였다.”고 하는 일들이 있게 되었다.

천주교인들이 증가하면서 한글 서학서에 대한 수요가 더 많아졌다. 그러자 베낀 한글 서학서를 구입해서라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베껴 쓴 서학서가 상품화되어 돈을 받고 사고파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요한은 일을 하는 틈틈이 글공부를 하여 천주교 서적을 많이 베껴 교우들에게 팔기도 하고 주기도 하였다.”

“안군심은 자기 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거룩한 가르침의 서적을 베끼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또 책의 내용을 교우들은 물론 외교인들에게까지 설명하여 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상의 이야기들이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하여 얻거나 구입한 한글 서학서들을 교인들은 매우 귀하게 여겼다. 공력이 많이 들었던 까닭에 비쌌던 이유도 있었다. 쌀 한 섬(石 : 10말, 144kg)에 5냥 하던 때에 책 한 권 값은 1냥 7전으로 약 쌀 3말 반의 가격이었다.

양화진 절두산 순교성지 ⓒ천지일보 2023.11.30.
양화진 절두산 순교성지 ⓒ천지일보 2023.11.30.

1790년 대에는 서학서를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 필사자까지 생겨났다. 전광수(全光受)는 천주교 서적을 만들어 사방으로 다니며 팔았다. 그리하여 “사서(邪書) 즉 사악한 서적(서학서를 말함)이 크게 유행하여 임서자(賃書者) 즉 전업적 책 베껴 쓰는 자가 큰 이득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상황이 되었다.

김세박(金世博)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김범우(金範禹)의 친척으로, 교회 창설 직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입교하자 아내와 자식들이 천주교를 심하게 배척하여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는 1791년 가족들을 떠나 지방의 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베껴 쓰는 전문 인력을 고용하여 한글 교리서를 만들어 파는 사람도 생겨났다.

천주교인 탄압 때 교인들이 갖고 있던 천주교 서적들도 수색하여 증거물로 압수하였다. 1801년 탄압 때 120종의 천주교 서적이 압수되어 소각되었는데, 그중에 83종이 한글본이었던 것을 보면 천주교 서적의 번역과 소장이 광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필사된 책은 그 베끼는 공력으로 말미암아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광범하게 보급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인쇄소의 설치와 인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863년경에는 서울에 인쇄소가 마련되어 값싸게 많은 책을 찍어 보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쇄소가 서울에 두 군데나 있었다. 그러나 1866년 또다시 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인쇄소는 매각되고 한글 서학책의 보급도 급격히 위축되었다.

한글은 한문으로 된 서양 천주교 서적으로 번역하여 민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정신이 그대로 구현되었다. 한글은 이렇게 새로운 문명을 맞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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