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란 무엇인가. 오늘날 세태는 효(孝)를 낡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시대가 된 것인가. 맹자는 이렇게 가르쳤다.

‘효자의 지극함은 어버이를 높이는 일보다 더함은 없을 것이다. 어버이를 높이는 일의 지극함은 천하를 가지고 봉양해 드림보다 더함은 없을 것이다. 천자의 아비가 되니 높음의 지극함이요, 천하로써 봉양하니 봉양의 지극함이니라.’

최근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이재준 고문은 조선시대 유림의 거목인 정암 조광조와 조선 후기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귀중한 두 편의 간찰을 발굴, 본지에 독점 공개했다. 이 두 점 간찰은 모두 부친에게 쓴 것으로 평소 애틋한 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이 고문의 기고를 전재한다.(편집자 주)

조선 최고 지성 ‘효(孝)’ 간찰 2점 발견

오늘날 ‘효(孝)’ 의미 돌아보는 계기 되길

정암 조광조의 간찰, 38.5㎝x24.5㎝, 종이. 정암이 부친의 안위와 병중에 있는 모친 여흥 민씨를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개인 소장) ⓒ천지일보 2023.10.29.
정암 조광조의 간찰, 38.5㎝x24.5㎝, 종이. 정암이 부친의 안위와 병중에 있는 모친 여흥 민씨를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개인 소장) ⓒ천지일보 2023.10.29.

客臘委顧迨今耿耿而隆寒中送 別尤極不睱之慮 未審新元/ 卽日孝直 頓/ 堂上氣候萬重 侍彩多祉否向念 不已耳于中拙慈/ 候里新益添憂懼何等身瘍藥效 乍發而旋止如是做 甚事耶只自憫/ 憐家兒過期不還 慮無不至令人生○/ 科期眞僞莫卞白其處亦 百祥操不敢如何餘伸 昏不一南絶無聊/ 卽日孝直 頓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섣달 방문 후 지금까지 마음에 잊히지 않고 심한 추위 가운에 송별하여 더욱 염려가 됩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새해 설날에 부모님께서는 기체후 만중하시며 모시는 체리도 다복하신지요? 마음속으로부터 향념이 그치지 않을 뿐입니다. 졸렬한 저는 어머님께서 새로이 병을 더하여 두렵고 신양에 대한 약효는 조금도 없고 잠깐 증세가 발생하여 점차 그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무슨 일이 이러합니까? 다만 딱하고 가엾을 뿐입니다. 집 아이는 (과거)기일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만 생기게 합니다. 과거의 시기의 진위는 법제가 없어 그곳 역시 명백히 알지 못하니 백가지 상서로움을 잡아도 감히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혼미하여 일일이 쓰지 못합니다. 남쪽은 아무 재미있는 것이란 없고 무료히 지낼 뿐입니다. 당일에 효직(정암의 초명) 절하고 올립니다.”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중종 때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은 조선 사림의 태두로 존경을 받는다. 당시 기득세력인 훈구파와 대립 개혁 정치를 도모하려다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조사한 간찰은 민간에 소장되고 있는 것으로 여러 달 고증을 거쳐 세상에 공개하게 됐다.

간찰은 정암이 새해 초 화순으로 귀양을 가 무료하게 보내는 가운데 부친의 안위를 묻는 내용이다. 당시 정암의 모친 여흥 민씨도 병중이어서 약을 써도 차도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내용도 담겨 있다. 과거 공부를 하러 집을 나간 아들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정암은 이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 간찰의 서두는 통상적인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경어를 쓰고 있다. 마음 속 깊이 부모님의 건강과 안후를 물었다.

“새해 설날에 부모님께서는 기체후 만중하시며 모시는 체리도 다복하신지요? 마음속으로 부터 향념이 그치지 않을 뿐입니다.”

정암 조광조 초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10.29.
정암 조광조 초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10.29.

정암은 조선 500년 동안 사류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임금에게 ‘선비의 기개’를 배양하도록 요구함으로써 비판을 과감하게 용납할 것을 요구한 대쪽 같았던 학자였다.

또한 불의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이익만을 탐내는 기득권 세력을 축출하고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의리정신에 의한 정화를 추구했다. 개혁의식은 도학적 이념에 기초한 요순(堯舜)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4년 동안에 걸친 관직생활을 통한 업적을 네 가지 주제로 간결하게 평가했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君心)’ ‘왕도정치를 세상에 펴는 것(陳王政)’ ‘의로움이 실현되는 길을 여는 것(闢義路)’ ‘이욕(利欲)이 분출하는 근원을 막는 것(塞利源)’ 등이다.

이 주장은 바로 도학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과제였던 것이다.

정암의 최종 이상은 바로 ‘왕도정치’였다. 왕도는 패도(覇道)에 상반된 개념으로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덕에 의한 정치이다. 바로 인정(仁政)이다. 정암은 ‘언로를 여는 일’을 가장 중시했다. 언로가 소통하는가 막혔는가에 따라 왕도가 베풀어질 수 있는지 여부도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균관 학우였던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은 정암의 마지막을 지킨 선비였다. 학포는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방문했다. 양팽손은 21세 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정암은 사약을 받는다. 1519년 음력 12월 20일 금부도사가 도착했다. 정암은 자신의 운명이 다함을 알고 마지막 ‘절명시(絶命詩)’를 지었다. 아, 임금에 대한 충성이고 나라 걱정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의연한 학자요, 정치가의 바른 심경이 넘친다. 효자로서 모친의 병을 걱정한 지 얼마 안 된 겨울이었다.

임금을 어버이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시대적 최고 지성으로 효자로서 바르게 살고자했던 학자 정암. 권력에 눈이 먼 집단 세력에 의해 조선 최고 양심을 가진 이가 사라진 것이다. 지금 현대 정치 사회에서도 이런 음모의 악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완당 김정희 간찰, 40㎝x31㎝, 한지. 신묘년(1831) 45세의 완당이 생부가 강진 고금도에 유배당하자 노심초사 걱정하며 보낸 간찰이다. (개인 소장) ⓒ천지일보 2023.10.29.
완당 김정희 간찰, 40㎝x31㎝, 한지. 신묘년(1831) 45세의 완당이 생부가 강진 고금도에 유배당하자 노심초사 걱정하며 보낸 간찰이다. (개인 소장) ⓒ천지일보 2023.10.29.

卽於匪料承拜 (辛卯二月十八日 正熹 拜)/ 惠狀從審肇炎動靖萬重慰仰曷任賤狀一味沈頓曷寧是 來後姑未更承續情 日以直鬱耳 守護/ 軍事寧欲無言玆 得鄙邑扎然去第須 轉及而一依樣時所報 爲之如何耳鄙後形 遠便至於之此爲望不/ 繼此有眞會同故耳 此便甚怜節之外未及 付去留續便之不宣

“뜻밖의 은혜롭게 내려주신 서찰을 받고 5월의 더위에 기거동정이 편안하심을 알고 우러러 위로됨이 끝이 없습니다. 미천한 저의 모습은 한결같이 기력이 쇠하여 어찌 편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 아직 다시 이어서 받들지 못하니 날마다 마음이 우울할 뿐입니다. 수호하는 군사의 일에 대하여는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겠습니까? 제가 보낸 서찰은 분명 갔을 텐데 다만 틀림없이 전달되었으나 매양 전과 같은 모양으로 알려왔으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뿐입니다. 저는 뒤에서 멀리 있는 형편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니 계속 이와 같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에 진실된 회동을 이루겠습니다. 이는 심히 지혜로운 절조가 아니나 삶과 죽음에는 미치는 일이 아닙니다. 계속 인편이 가니 이만 줄입니다. 신묘 2월 18일 정희 배”

완당 김정희(1786~1856) 간찰은 세도가 안동 김씨의 정적이 되어 가문이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쓰인 것으로 고난의 시절을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를 받은 이는 완당의 생부 김노경이다. 신묘년(1831) 45세의 완당이 생부가 강진 고금도에 유배당하자 노심초사 걱정하며 보낸 간찰이다. 완당의 간찰에서도 부친에 대한 무한한 효심이 넘친다.

“뜻밖의 은혜롭게 내려주신 서찰을 받고 5월의 더위에 기거동정이 편안하심을 알고 우러러 위로됨이 끝이 없습니다. 미천한 저의 모습은 한결같이 기력이 쇠하여 어찌 편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 아직 다시 이어서 받들지 못하니 날마다 마음이 우울할 뿐입니다.”

귀양지에서 부모가 보내준 서찰을 받고 기쁜 마음과 가까이 받들지 못하는 불효를 안타깝게 표현한 것이다. 이 편지는 귀양지에 있는 부친의 요청으로 사람을 시켜 군사들에게 부탁을 해도 시정되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이 간찰에 완당이 정희(正喜)라는 휘(諱, 이름)를 쓴 것은 생부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 완당가문은 정적인 안동 김씨의 모함으로 몰락하기 시작해 10년 후 자신이 제주도에 유배당하여 9년간 고생을 한다.

완당 김정희 초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10.29.
완당 김정희 초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10.29.

완당은 24세 때인 1809(순조 9)년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부사(副使)인 생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연행(燕行) 길을 다녀온바 있었다. 젊은 시절 중국에 간 것을 인연으로 옹방강 완원 등 중국의 최고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조선 서계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작품 중에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최근에는 제주도 귀양지에서 원찰인 예산 화암사에 보낸 ‘시경루(詩景樓, 개인 소장)’ 현판과 민영익가문과 관련이 있는 ‘난선면도(蘭扇面圖)’ 등이 발굴 조사됐다. 문집으로 ‘완당집’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재시고(覃硏齋詩藁)’ 등이 있다.

* 이 두 점의 간찰을 탈초, 번역해주신 한학자이신 남해 김원동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주석
客臘 : 지난해의 섣달. 지난 섣달. 객년(客年)의 납월(臘月)
委顧 : 방문 
耿耿 : 마음에 잊히지 아니함 
未審 : 확실(確實)하지 못한 일에 대(對)하여 늘 마음이 놓이지 아니함
肇炎 : 음력 5월의 더위를 이르는 말 
去留 : 떠남과 머묾. 일이 되고 안 됨. 죽음과 삶 
沈頓 : 기운이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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