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어느 복싱 도장에 가면 벽에 ‘선, 인간챔피언/ 후, 세계챔피언’이란 글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큼지막하게 붓글씨로 쓰여 액자에 담긴 이 글은 젊은 시절 MBC 신인왕 출신으로 세계챔피언을 꿈꿨던 이 도장 관장님의 신념이 담겨 있다. 아무리 복싱을 잘하고 세계 챔피언에 올라도 먼저 인간이 안 되면 소용이 없다는, 아주 깊은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도장에서 수련하는 관원들은 하나 같이 예의가 바르고 구김살이 없다. 10대 어린아이들부터 청년과 중장년, 60이 넘은 수련생들이 함께 쒹 쒹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주먹을 휘두르고 매트를 두들긴다. 팔랑팔랑 줄넘기를 하고 링 위에서는 스파링을 하면서 실력을 겨루기도 한다. 도장에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함께 스파링을 하거나 몸을 풀 때도 늘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다정한 미소도 잊지 않는다. 복싱보다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는 관장님의 뜻을, 찰떡 같이 알아듣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격한 격투기 도장이라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함께 수련하는 도량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복싱 도장 관장님의 가르침처럼,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눈앞의 이익과 별것도 아닌 자존심과 명예, 티끌만도 못한 너저분한 권력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 인간의 품격을 잃어버리고 만다.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국가대표 스포츠 선수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데도 말이다.

동화 속 주인공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빌고 빌었다. 이탈리아의 작가 카를로 콜로디의 소설로 책과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나와 전 세계 어린이들의 친구가 된 피노키오다. 보잘것없는 장작 나무가 인형으로 만들어져 우여곡절 끝에 인간이 된 이야기가 독자들의 가슴에 두고두고 흐뭇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이상형 여인을 조각 작품으로 빚었다. 그리고는 매일 “이 조각품과 닮은 여인과 짝을 맺게 해 달라”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빌고 빌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조각품을 진짜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만들어 줬다. 인간으로 변하는 조각품과 피그말리온이 키스를 나누는 장면은 각종 작품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이 이야기는 절실하고 진실되게 바라고 또 바라면 반드시 이뤄지고 만다는 교훈을 남겼다. ‘피그말리온 효과’다.

피노키오는 스스로 인간이 되고자 해 그 뜻을 이뤘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조각 작품을 닮은 인간을 간절하게 원해 소원을 이뤘다. 어느 쪽이 됐든, 뭐든지 간절하고 절실해야 얻을 수 있고 그것이 또한 소중하다는 것도 알려 준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졌다.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알고 있었다. 작가는 피노키오의 코를 통해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아이들한테는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좋은 인간이 되는 최고의 덕목이라 여겼고 그렇게 가르쳤다.

그럼에도 늘 거짓말은 있어 왔고, 지금도 입에 거품을 물고 거짓말하는 인간들이 있다. 우리들 곁에도 거짓말이 공기처럼 떠돌고 있다. 입만 열만 거짓말, 듣고 보면 거짓말, 얼굴에 철판 깔고 거짓말, 온갖 거짓말이 난무한다. 거짓말이 일상이다.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 편이 옳다, 우리 편 힘내세요, 우리 편 만세를 외친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염치도 없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네 편 내 편 따지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자. 거짓말만 덜 해도 인간이 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