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 주담대 수요에 늘어
5대 은행서 한 달 만에 1.6조↑

부동산 규제 완화 기조 영향도
금리 높여도 정책에 효과 반감

거시·통화 공조 필요 지적 나와
신뢰성 측면서 불확실성 커져

 서울 시내 시중은행 외벽에 붙은 주택담보대출 상품 금리 안내 현수막 모습. (출처: 뉴시스)
 서울 시내 시중은행 외벽에 붙은 주택담보대출 상품 금리 안내 현수막 모습.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김누리 기자] 최근 가계대출이 주택담보대출 수요에 힘입어 가파르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금융당국과 통화당국 간의 엇박자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상 최대치까지 치달은 가계부채를 잡기 위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높여 잡았지만,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와 은행권을 향한 대출 금리 인하 압박 등으로 효과가 반감됐다는 분석이 나오면서다.

이러한 가운데 금융당국이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가계대출 급증의 주범으로 지목하면서 당국 간 엇박자로 인한 책임을 애먼 은행으로 떠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계대출, 한 달 만에 1.5조 늘어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680조 8120억원이다. 이는 한 달 전보다 1조 5912억원 늘어난 규모다.

가계대출 잔액은 1년 5개월 만인 지난 5월(1431억원) 전월 대비 상승 전환한 뒤 6월(6332억원), 7월(9755억원), 지난달까지 넉 달 연속 늘었다. 지난달 가계대출 증가 규모도 2021년 11월(2조 3622억원) 이후 1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가계대출 증가세를 견인한 것은 주택담보대출이었다. 5대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7월 512조 8875억원에서 지난달 514조 9997억원으로 한 달 만에 2조 1122억원 증가했다.

주택담보대출 중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판매액이 크게 늘었다. 5대 시중은행의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판매액은 지난달 31일 기준 4조 2823억원으로 한 달 전보다 3조 4166억원 늘었다.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판매가 중단될 수 있다는 시그널이 시장 내 대출 수요를 자극하면서 해당 대출이 불티나게 팔린 것으로 보인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관악산에서 바라본 아파트. ⓒ천지일보DB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관악산에서 바라본 아파트. ⓒ천지일보DB

◆가계대출 주범 주담대 왜 늘었나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늘어난 배경엔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의 영향이 컸다.

KB 주택시장 동향 자료에 따르면 9월 첫째 주 전국 아파트 매매는 0.03%, 전세는 0.05% 상승했다. 서울 아파트 매매는 지난주 0.08% 상승에 이어 이번주도 0.08% 상승했다. 전세도 전주 대비 0.10% 상승했다. 경기도는 전주 대비 매매가 0.06% 상승했으며 전세는 0.14% 상승했다.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변동률은 자치구별로 보면 송파구(0.28%), 성동구(0.19%), 영등포구(0.18%), 서초구(0.16%) 순으로 상승했다. 반면 관악구(-0.09%), 은평구(-0.04%), 중랑구(-0.03%), 노원구(-0.02%) 등은 하락했다.

아파트 매매량은 올해 1월부터 매달 점진적으로 늘어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간 매달 3천건대를 유지했다. 여름휴가와 장마 등 계절적 비수기 요인과 가격 상승에 따른 피로감, 관망세 분위기로 지난달 아파트 매매량이 소폭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추석 연휴 이후 상급지 아파트 매매량이 다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이다.

이 같은 현상은 대부분 지역의 분양가상한제 해제 등 내용이 담긴 1.3 부동산 대책, 특례보금자리론 공급 등으로 주택시장이 과열된 데 영향을 받았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5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열린 금통위는 6년만에 준공된 한국은행 신축 본부에서 처음으로 진행됐다. (사진공동취재단) ⓒ천지일보 2023.05.25.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5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열린 금통위는 6년만에 준공된 한국은행 신축 본부에서 처음으로 진행됐다. (사진공동취재단) ⓒ천지일보 2023.05.25.

◆당국 엇박자도 가계대출에 악영향

정부의 규제 완화와 금융당국의 대출 금리 인하 압박 등으로 한은의 금리 인상 효과가 반감됐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지난 7월 금통위 회의 참석자들은 가계부채에 대한 깊은 우려를 드러내는 한편, 정부 정책이 가계부채 확대에 일조했다고 입을 모았다.

한 금통위원은 “최근 부동산 관련 규제 완화가 가계부채 증가세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면서 “거시건전성 정책과 통화정책 간의 적절한 정책 공조(Policy mix)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다른 금통위원은 “미국은 거시건전성 정책과 통화정책이 어느 정도 동조화됐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거시건전성 정책뿐 아니라 준재정정책(공기업 적자·은행채 발행 등), 창구지도 등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없는 정책들이 통화정책 기조와 괴리를 보이면서 통화정책 커뮤니케이션 신뢰성 측면에서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금통위원은 “최근 부동산 관련 규제 완화와 주택 대출 금리 하락 등으로 주택가격이 반등 조짐을 보이고 가계부채도 다시 증가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이 금리 인상으로 물가안정과 금융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으나 정부·당국이 부동산 규제 완화와 시중은행에 대한 대출 금리 인하 압박 등을 진행하면서 정책 엇박자를 낸 것을 비판한 셈이다.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9.04.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9.04.

◆금융당국 ‘50년 만기 주담대’ 잡기 나서

한은 금통위가 최근 주택 관련 대출의 증가 현상에 거시건전성 정책의 변화가 상당 부분 영향을 준 것으로 보는 가운데 금융당국은 시중은행 문책에 나섰다. 시중은행에서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이 출시된 지 한 달여 만에 판매량이 급증한 만큼 가계대출 급증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은 원리금을 50년에 걸쳐 상환할 수 있는 대출 상품이다. 만기가 길어져 대출자가 갚아야 할 전체 원리금은 늘어나지만,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줄어 전체 대출 한도를 늘릴 수 있다. 이에 따라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이 ‘DSR 우회 수단’으로 남용될 수 우려가 제기됐다.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증가세가 나타나면서 은행권을 상대로 ‘가계대출 취급 실태 종합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5대 은행에 3명의 감사 인원(은행감독국 2명, 은행검사국 1명)을 파견해 각 은행의 ▲대출 규제 준수 여부 ▲담보 가치 평가·소득 심사 등 여신심사 적정성 ▲가계대출 영업전략·관리체계 ▲고정금리·분할 상환 방식 등 질적 구조 개선 관리 현황 ▲가계대출 관련 IT(정보기술) 시스템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방침이다.

사실상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프로세스(절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살피겠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이 점검 결과를 바탕으로 최근 가계대출 급증의 원인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처방(지침)을 내릴 예정이다.

서울 시내 시중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출처: 뉴시스)
서울 시내 시중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출처: 뉴시스)

◆사실상 애먼 ‘은행 잡기’ 평가 나와

금융당국이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판매를 책잡는 것에 대해 은행권 일각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은행권이 판매한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이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기조에 발맞춰 출시됐기 때문이다.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은 윤석열 대통령 인수위원회 당시 ‘대출 규제 완화’ 공약에 따라 검토됐다. 금리 상승기 취약차주 부실 가능성에 대비해 상환 부담을 낮추고 청년층의 ‘내 집 마련’ 자금 마련을 돕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이에 따라 지난해 8월 한국주택금융공사(HF)는 50년 만기의 보금자리론과 적격대출을 출시했고, 올해 1월 특례보금자리론도 출시했다. 이후 한화생명, Sh수협은행, DGB대구은행, 하나은행, NH농협은행, 신한은행, KB국민은행, 우리은행 등 금융권도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출시했다.

정부가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출시한 이후 은행권이 따라간 만큼, 정부 당국의 지적이 사실상 ‘애먼 은행 잡기’에 그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대출 금리를 낮추라고 해서 낮추고,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취급하라고 해서 취급했더니 돌아온 것은 비판밖에 없다”며 “애초 통화정책과 역행한다는 우려가 계속 나왔음에도 이를 간과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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