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초상화.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초상화.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제98주기 추모 제향 열려
언론활동과 교육·구국·계몽운동, 독립선언서 인쇄·배포 총책
가혹한 심문 속 옥중 투쟁 “기회 되면 또 독립운동 할 것”
일생을 나라에 헌신하다 68세에 셋방서 영양실조로 눈 감아

[천지일보 충남=김지현 기자] “민중 각자는 짚단 위에 잠자고 창을 베개로 하며 끓는 물 속이나 불 속의 형세라도 흔쾌히 뛰어들어 온 누리가 자주독립(自主獨立) 되게 하여 일월(日月)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 나라에 대한 공로만으로 그치겠는가. 후세에 이 말을 반드시 전하여 훌륭한 조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충남 태안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옥파(沃波) 이종일(李鍾一) 선생의 피 끓는 애국심이 나타난 자주독립선언문의 일부 글이다. 그의 ‘제98주기 추모 제향’이 지난달 31일 원북면 반계리 이종일 선생 생가지에서 거행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제98주기 추모제향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제98주기 추모제향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옥파 이종일 선생 추모사업회가 주관한 이날 추모 제향은 가세로 태안군수, 신경철 태안군의장, 김종인 추모사업회장을 비롯해 각급 기관·사회 단체장과 성주이씨 대종회 관계자, 지역 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제98주기 추모제향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가세로 태안군수(맨 오른쪽).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제98주기 추모제향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가세로 태안군수(맨 오른쪽).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이날 추모 제향에서는 대통령 헌화와 개식사, 행장낭독, 추모사, 제향, 헌화 및 분향 등이 진행돼 옥파 이종일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렸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옥파 이종일 선생(1858~1925)은 언론활동과 교육 및 구국운동, 계몽운동 등 일생을 나라에 헌신하다 초라하게 죽음을 맞은 애국 사상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제98주기 추모제향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분향을 하고 있는 가세로 태안군수.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제98주기 추모제향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분향을 하고 있는 가세로 태안군수.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제국신문 창간, 개화운동의 전기 이뤄

옥파 이종일, 그는 1858년 11월 6일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묵암(默庵)·옥파(沃波), 도호(道號)는 천연자(天然子), 필명으로 중고산인(中皐散人), 또는 중헌(中軒) 등을 사용했다.

‘향당(鄕黨)의 고사(高士)’라고 칭송을 받던 아버지 이교환(李敎煥)과 어머니 청풍김씨(淸風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조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을 지낸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20세손 이순유(李純由)이다.

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와의 사이에 혈육이 없어 동생의 아들 학순(學淳)을 양자로 입적했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872년경 상경했고 1873년 문과에 급제했다. 김윤식을 스승으로 삼아 그 집을 왕래하며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이도재로부터 개화사상을 전수받은 바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생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생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의 실학서적을 읽었고 박은식, 정교, 이동녕, 남궁억, 양한묵 등과 실학에 대한 담론을 벌였다. 특히 자신이 직접 실학 관련 서적을 저술하려고 계획하는 등 누구보다도 철저한 개화사상을 소유한 선각자였다.

그가 25세였던 1882년에는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이때 3개월간 체류하며 일본의 선진문물을 견문하고 커다란 자극을 받아 개화사상을 정립하고 개화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귀국 후 1895년에는 내부 주사를 지냈고 1898년에는 정3품 중추원 의관으로 10개월간 재임하며 관직 생활을 했다. 당시 중추원은 의결권 없이 단순히 내각에서 교부하는 사항에 대해서만 의견을 개진하는 유명무실한 내각의 부속기관에 불과했고 이에 중추원에 대해 신랄히 비판했다.

이후 이상재의 권유로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1898년에는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 주도했다. 대한제국민력회는 독립협회와 상보적(相補的) 단체로서 정부의 비정(秕政)을 비판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였다. 정부로부터 독립협회가 탄압당하자 민력회 회장으로서 회원들을 동원해 독립협회를 지원하기도 했다.

1898년 8월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한 것은 그의 개화운동에서 큰 전기를 이루는 계기가 됐다. 그는 신문을 문명과 개화를 추진하는 모체이자 개명을 위한 나침반으로 여기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0여년 간 제국신문의 발간을 주도했다. 제국신문은 순한글판으로 발행됐으며 독자층을 하층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했다.

이는 제국신문을 통해 여성을 국가발전에 유용한 잠재적 자원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여성해방론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1906년에는 만세보(萬歲報)의 창간에도 관여했으며 1908년에는 대한협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활발한 언론활동을 펼쳤다.

49세이던 1906년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했다. 이미 1898년부터 손병희와 왕래하며 시국담을 나누고 동학(東學) 입교를 권유받는 등, 입교 이전부터 동학사상에 상당한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천도교 입교 후에는 천도교월보 과장과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사장으로서 천도교단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천도교의 역사를 정리한 본교역사 출간과 동경대전의 번역이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 기념관에 있는 동상.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 기념관에 있는 동상.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본격적인 독립투쟁에 나서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제의 작위 수여 제의를 거절하고 본격적인 독립투쟁에 나섰다. 이때부터 민족주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민족주의는 그 나라의 전통을 훼손치 않게 보존하려는 정치적 충성심의 발로’라고 정의하는 한편, 종교인이 선봉이 되어 동학운동을 계승한 대중봉기를 일으키고자 했다.

보성사 사원을 중심으로 전개한 범국민신생활운동은 비정치성 집회를 표방한 것이지만 실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계획한 것이었다. 1912년 7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자신이 손수 국민집회의 취지문, 건의문, 행동강령을 기초했지만 사전에 일제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결과 보고를 받은 손병희는 그에게 천도구국단이 독립국가 건설의 수임기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주도한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와 천도구국단은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서 3.1운동의 모태가 된 비밀결사였다.

1919년 2월 초순부터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완성돼 2월 15일 최린에게 건네졌다. 독립선언서는 완성 직후 기독교 측의 동의를 구한 후 오세창이 총책을 맡고 보성사 사장이었던 그의 책임하에 인쇄가 진행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 기념관에 있는 동상.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 기념관에 있는 동상.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들과 함께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회합을 갖고 다음날 있을 독립선언식의 결의를 다졌다. 3월 1일 오전까지 집에 남아있던 독립선언서를 배부한 뒤 약속 장소인 태화관으로 나갔다. 오후 2시 태화관에 29명의 민족대표가 참석하자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인쇄, 배포한 독립선언서의 일부 오자를 수정하며 크게 낭독했다. 뒤이어 한용운의 인사말과 만세삼창이 있었다.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식 이후 손병희 등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제에 붙잡혀 연행됐다. 일본 경찰들이 민족대표를 공손하게 대하자 이를 내란죄를 적용시켜 극형에 처하려는 간교한 술책으로 간파하였고 일제의 고문이 가혹해지면서 일부 민족대표들의 나약한 행동을 보이는 것을 질타하면서 한용운, 이승훈과 같이 의연한 자세를 보이는 민족대표를 칭송했다.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자주독립선언언문 일부 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자주독립선언언문 일부 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그 자신은 일본 경찰, 검사와 판사의 심문에 대해 의연한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일본인 검사와 판사의 심문에 대해 일제의 강제 병탄에 반대하는 의사를 명확히 하고 “시기가 오면 또다시 있는 힘을 다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힘든 수감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정세를 날카롭게 분석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또 출옥한 장효근이 면회 올 때마다 독립운동의 재기를 역설했으며 출옥과 동시에 제2의 3.1운동을 주도하고자 결심했다.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 형식으로 석방됐다. 출옥 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 결심한 제2독립운동을 실현하기 위해 비밀리에 계획을 진행했다.

그의 말년은 매우 불우했다. 셋방에서 먹을 끼니조차 없이 지내다가 결국 영양실조로 1925년 8월 31일 6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그러나 양자마저 옥고를 치르는 동안 병으로 사망했고 재산을 거의 남기지 않아 친지와 동지들의 주선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생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생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옥파의 생가, 원북면 반계3리 닻개마을

배를 정박하기 위한 기구인 닻이 닿았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반계3리의 닻개. 닻개마을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옥파 이종일 선생이 태어났다. 반계3리 마을엔 복원된 이종일 선생의 생가, 사당, 기념관이 있다. 반계3리(磻溪3里)는 서쪽 끝에 반계1호 저수지를 끼고 대부분의 땅이 울창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다.

반계3리의 중심마을 ‘닻개’는 산속 작은 마을이지만 사실 오래 전엔 꽤 많은 이들이 드나들던 항구였다. 배를 정박시킬 때 사용하던 기구를 말하는 ‘닻’과 바다를 의미하는 ‘개’가 합쳐져 이름 붙여진 닻개는 원북면 중심부에 위치해 지금은 해안가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현재 닻개마을엔 옥파 선생의 생가 터와 사당 충애사, 옥파기념관이 조성돼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생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충남 태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 선생의 생가. (제공: 태안군청) ⓒ천지일보 2023.08.31.

옥파 선생의 이름을 딴 반계3리의 옥파로를 따라 들어가면 선생의 숨결을 만날 수 있다. 양쪽으로 태극기가 펄럭이는 길을 지나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엔 옥파기념관이 있고 더 깊이 들어가면 체험관과 옥파 선생 생가 터가 마련돼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엔 사당 충애사가 자리하고 있다. 옥파공원에 방문하면 일반적으로 사당을 참배하고 생가를 둘러보고 체험관에서 다양한 체험을 한 후 옥파기념관에서 이종일 선생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된다.

현재 반계3리에서는 생가 주변을 옥파공원으로 조성해 이종일 선생을 정성껏 기리고 있다. 공원에는 선생의 동상과 사당, 기념관, 복원된 생가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생가는 발견되었던 모습을 최대한 살려 동향으로 6칸의 겹집이 ‘ㄴ’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초가집이다.

사당인 충애사는 추모사업회 장인 박춘석에 의해 1990년에 완공됐는데 사당에 들어가면 옥파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위인의 기개, 그리고 그의 눈물과 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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