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8)

“놈들이 지나간 말발굽 자국이 여기 있다. 놈들은 이제 독안에 든 쥐다. 더 멀어지기 전에 따라잡아 무찔러라.”

독립군의 병력이 보잘 것 없다는 말은 들은 일본군은 1920년 10월 20일 의기양양하게 청산리를 3면으로 포위하고 기병대일부를 가지고 대담하게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백운평 삼림을 점령했다.

“어리석은 놈들, 놈들이 걸려들었다. 전원 사격!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콰콰쾅… 쾅쾅.”

일본군은 “함정이다. 전원 퇴각하라”고 외치며 위기에 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독립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군의 퇴각로를 지키며 그들을 초토화시켰다.

이는 바로 봉오동 전투와 더불어 독립운동사에 기록된 역사적인 승리 중에 하나인 청산리대첩이었다.

당시 청산리로 들어선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정확한 매복 지점도 파악하지 못한 채 독립군의 집중포화 공격에 20여 분만에 전멸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에 걸쳐 싸운 청산리전투는 1600여 명의 대한독립군이 병력과 화력이 모두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10여 회의 크고 작은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300여 명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지휘봉을 잡고 겨레의 얼을 빛낸 영웅은 바로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은 보수와 진보, 좌와 우가 아닌 오직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실천주의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부친이 세상을 떠난 17세의 김 장군은 집안 만석지기의 가산을 노비들에게 나눠 주면서 해방을 시켜,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의무) 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선 신학문과 신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취적인 생각을 소유했던 김 장군은 99칸에 이르는 집에 학교를 세웠고, 고향인 홍성에 호명학교를 세워 국가 백년지대계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념촬영한 단원들(맨 앞이 김좌진).

하지만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차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돼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서대문 감옥에서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출소 후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1918년 만주로 망명해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으며, 그 해 1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이후 김 장군은 대한정의단을 토대로 군정부를 조직해 본거지를 왕칭현에 두고 5분단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키면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벌이게 됐다.

전장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혁혁한 공을 세운 김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종전의 부하로, 김일성의 교사를 받은 고려공산청년회 소속인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불과 4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심일수(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부장은 “조국을 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의 투쟁에는 많은 노선이 있지만 김좌진 장군님이 택한 투쟁의 방법은 항일 무장투쟁이었다”며 “당시 청산리전투는 세계 최강부대인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는 김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선구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선열들의 독립투쟁정신과 민족혼을 배우고자 지난 2001년 제1회 대학생 청산리 구국대장정을 시작으로 2009년 6월까지 총 8회에 걸쳐 청산리 역사대장정을 진행해 왔다.

▲ 백야 김좌진 장군의 어록비 ‘단장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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