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10)

▲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박사. (사진제공:서재필기념사업회)
“신문! 신문! 매장에 한 푼씩이요.”

아직 신문이 없고, 인쇄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시절, 취재부터 편집 그리고 인쇄까지 손수 해야 했던 한 사내가 거리를 활보하면서 외친 말이다.

그는 바로 민족계몽에 사활을 걸며 당시 수구세력의 견제와 압제 속에서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박사다.

“조선 여인들이 불행한건 남성들이 계몽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1896년 독립신문 사설을 통해 전한 그의 메시지는 한국을 서서히 개화해 독립으로 이어지는 서광으로 인도했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 박사는 서광효의 아들로 7세에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인 김동근의 휘하에서 한학을 수학, 1882년(고종 19년)에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과거(병과 3급)에 급제했다.

벼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을 비롯해 서광범, 박영효 등 개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에 눈을 뜨게 됐다.

1883년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서 박사는 동경의 호산(戶山)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해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운 후 1984년에 졸업하고 돌아와 왕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진언했으나 수구파의 방해로 실패했다.

같은 해 4일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신정부의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명성황후 일파의 견제와 청국의 군사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참형 혹은 자살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서 박사는 펜실베니아주 웩스바레 중학교를 다니고, 1888년 라파에트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미육군 의학박물관에 의서들을 번역하는 일을 하다가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로 마침내 1889년 워싱턴의 컬럼비안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1892년 한인 최초로 가필드병원에서 세균학을 전공으로 정식 의사가 됐고,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또한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됐다.

이후 그는 1896년 명성황후 일파가 몰락하자 귀국해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내무대신 유길준과 교섭, 정부 예산을 얻어 한글로 간행된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 독립문 앞에서 사진을 찍은 송재 서재필 박사의 모습.  (사진제공:서재필기념사업회)

그는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모화관을 인수,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했고,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출국이 강요돼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19년 3.1운동을 전해들은 서 박사는 잡지 ‘이브닝레저’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구회’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 후원회를 만들었다.

1919년 겨울부터 펜실베니아 대학의 강의를 맡는 서 박사는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했다.

1922년 워싱턴의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의 370여 단체가 서명한 연판장을 돌렸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 규탄했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김종채(서재필기념사업위원회) 이사장은 “서재필 선생을 말할 때는 독립운동가, 개혁가, 언론인, 의학자 4가지로 떠올릴 수 있다”며 “특히 독립신문의 경우 당시 양반계층 10%만 보던 신문을 90% 가까이 보게 해 국민 전체적으로 국내·외 추세를 알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위치한 서재필기념공원의 전경. (사진제공:서재필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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