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여일 장기전 치닫는 전쟁
도심 공습에 민간 피해 가중
군에 입대한 여성들 10만여명
“지옥 같지만 해야만 하는 일”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의 주요 도시인 크라마토르스크에서 전날 러시아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식당 앞에서 심리 상담가가 한 희생자의 가족을 껴안아주고 있다.(AP/연합뉴스)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의 주요 도시인 크라마토르스크에서 전날 러시아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식당 앞에서 심리 상담가가 한 희생자의 가족을 껴안아주고 있다.(AP/연합뉴스)

[천지일보=최혜인 기자]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525일째를 맞으며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지도부나 권력층보다 청년·여성·아이 등 민간인, 특히 약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면서 민간 피해가 가중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밤사이 자는 순간에도 미사일과 자폭 드론이 날아오는 처참한 전쟁 상황 속에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직접 뛰어든 여성들이 있다. 2일(현지시간)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양국에선 수만명의 여성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을, 총이 아니면 펜을 들고 나서고 있다.

이날 우크라이나 국방부에 따르면 현재 5000여명 규모의 여성 군인들을 포함해 총 4만 2000명 이상의 여성들이 군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러시아가 크림(크름)반도를 강제 병합한 지난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군에서 여성 군인들의 비율은 지속 증가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6만여명의 여성들이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규군 수만 4배 이상 격차를 보이며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평가받던 상황을 고려하면 양국의 여성 병력은 그리 크지 않은 차이다.

최근에도 도심 한가운데 미사일이 떨어져 10세 소녀와 가족이 숨지는 등 민간 피해가 이어지는 가운데, BBC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선 여성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먼저 안드리아나 아레흐타는 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 부사관으로 전선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헤르손 지역에서 지뢰에 의해 큰 부상을 입은 후 재활에 전념해왔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이 러시아 공습으로 파괴된 아파트 건물을 지나가고 있다. 이날 러시아군이 키이우, 드니프로, 폴타바 등 주요 도시를 공격해 최소 8명이 사망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이 러시아 공습으로 파괴된 아파트 건물을 지나가고 있다. 이날 러시아군이 키이우, 드니프로, 폴타바 등 주요 도시를 공격해 최소 8명이 사망했다. (AFP/연합뉴스)

안드리아나는 “당시 러시아군이 제가 다리도 팔도 없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렇게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러시아군은 비방 선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그를 죽은 자로 발표하고 심지어 ‘나치’ ‘처형자’로 묘사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그러한 상황을 봤을 때 웃음이 나왔다. 저는 살아 있고 앞으로도 조국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남자들이 더 잘 싸울 것이라는 지배적인 시각과는 달리 여성이 특정 분야에서 더 전투를 잘 수행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또 다른 특수부대 소속 예브게니야 에메랄드(31)는 “지휘관에게 제가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을지를 물었고 ‘당신은 저격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며 “남자가 쏘지 말지 주저한다면 여자는 절대 주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녀에 대한 사랑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듯 슬하에 두고 있는 3개월 된 딸을 껴안았다. 그는 지난 2014년 러시아가 공격해올 당시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지난해 전쟁 발발 후에야 비로소 군에 입대하게 됐다고 부연했다.

군인이 체질에 맞아서, 혹은 전투를 잘해서 군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피력했다. 예브게니야는 “저격수는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볼 수 있다. 목표를 맞추는 것도 볼 수 있다”며 “사실 이는 모든 저격수에게 지옥과도 같은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을 때 격한 감정이 들었다며 “30초 동안 온몸이 떨렸고 그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는 것도 느꼈다”고 전했다.

예브게니야는 러시아군과도 싸우고 있지만 곳곳에 만연한 성차별적 요소와도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특수부대에 막 입대한 때 한 남성 부대원이 다가와 ‘여잔데 여기서 뭐하느냐. 보르시치(우크라이나 전통 수프)나 끓여라’고 했다”면서 “그 순간 너무 기분이 상해 ‘농담이냐. 부엌에 있을 수 있지만 너를 기절시킬 수도 있어’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이들에 따르면 수만명으로 늘어난 우크라이나군 여성들은 성별에 맞는 유니폼을 다 갖출 수도 없었다. 그들은 남성용 내복을 포함한 심하게 큰 치수의 신발과 방탄조끼 등을 지급받았다. 이와 관련 한나 말랴르 우크라이나 국방차관도 “야전 유니폼은 남성용으로 디자인됐다”며 “당시 이들이 남성보다 키가 작기 때문에 맞춰 입어야만 했다”고 덧붙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AP/뉴시스] 지난 23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군 징집병들이 할당 군부대로 향하기 전 열린 송별식에 참석해 도열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봄 징집 기간 18~27세 사이 14만7000명을 징집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징집병들은 1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AP/뉴시스] 지난 23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군 징집병들이 할당 군부대로 향하기 전 열린 송별식에 참석해 도열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봄 징집 기간 18~27세 사이 14만7000명을 징집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징집병들은 1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들이 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인테르팍스 통신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 언론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들이 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인테르팍스 통신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 언론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