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361(공민왕 10)년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킴으로써 승여(乘輿)가 몽진(蒙塵)을 하게 됐는데, 신료(臣僚)들이 허둥지둥해 대부분이 무너져 흩어졌으나 이색(李穡)은 왕을 호종해 곁을 떠나지 않고 일심(一心)으로 호위헸을 뿐 아니라 지병부사(知兵部事)가 되어서 군국대사(軍國大事)에 참가했다.

그래서 마침내 1363(공민왕 12)년 2월에 이색은 왕을 호종해 송도로 귀환했으며, 윤3월에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의 칭호 증서를 왕이 하사하고 도형벽상(圖形壁上)의 은전(恩典)으로 논과 밭 100결을 주고 또한 노비 10인을 하사했으며, 또한 후손은 음직(蔭職)으로 등용하도록 했다.

또한 12월에 원나라에서 붕훈대부(奉訓大夫) 정동행중서성거(征東行中書省) 유학제거(儒學提擧)를 본국에서는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에 제수됐다.

한편 이듬해 정월 이색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제점서운관사(提點書雲觀事)에 임명되고,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았다.

1365(공민왕 14)년 3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전임됐다.

6월에는 첨서밀직사사(籤書密直司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임명되고, 이어서 제조전선사(提調詮選事)가 되고, 10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됐다.

1367(공민왕 16)년 이색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와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하는 중책의 소임을 맡게 되는데, 왕은 홍건적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성균관(成均館)을 쇄신하는 차원에서 그 건물을 수리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하여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등을 학관(學官)으로 임명했다.

1368(공민왕 17)년 전국에서 배움을 열망을 품은 채 성균관으로 생도(生徒)들이 모여들자 이색은 매일 여러 학관들과 더불어 생도들에게 교수를 마치고 나서는 서로 모여 앉아 토론하고 변석하면서 종일토록 피곤함도 잊었다.

그리하여 동방(東方)에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진흥됨으로써 학자들이 기송 사장(記誦詞章)을 추향하는 기습을 버리고 신심성명(身心性命)의 이치를 연구해 사도(斯道)를 높일 줄을 알아서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고, 의리를 밝히고자 해 공리(功利)를 꾀하지 않았으니 유풍(儒風)과 학술(學術)이 환하게 일신된 것은 모두 목은(牧隱)이 후진들을 교회(敎誨)시킨 힘이 됐다.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왕이 구재(九齋)에 행행해 친히 제생(諸生)에게 경의(經義)를 시험 보이면서 공을 독권관(讀券官)으로 삼아 이첨(李詹) 등 7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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