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세에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혼례(婚禮)를 치른 이색(李穡)은 그 이듬해에 원나라에 유학을 떠나니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당시 원나라에는 그의 부친 이곡(李穀)이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재임 중이었는데, 베이징에 도착한 목은은 원나라의 국립대학(國立大學)이라 할 수 있는 벽옹(辟雍)에 입학했다.

덧붙이면 벽옹은 중국 주나라 때 천자(天子)가 도성에 건립한 대학으로서 주위의 형상이 벽과 같이 둥글고 물이 둘러 있었다고 하여서 그 명칭을 벽옹이라고 한 것인데, 고려(高麗)의 성균관(成均館)이 벽옹과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색은 벽옹에서 3년 동안 수학하면서 중국의 연원 있는 학문을 받아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공부를 좀 더 깊이 할 수 있었다. 한편 원나라 조정에서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고 있었던 이곡이 귀국하였으나 그 이듬해 정월에 향년(享年) 54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으며, 베이징에서 유학생활(留學生活)을 하던 이색이 귀국하여 3년 동안 분상(奔喪)을 치렀다.

그 이후 1353(공민왕 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의 수도 경사(京師)에 갔으며 5월에 과거시험(科擧試驗)이 실시되었는데, 이제현(李齊賢)과 홍언박(洪彦博)이 시험관(試驗官)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이 시험에서 이색은 을과(乙科) 제일인(第一人)으로 합격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으며 가을에는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의 제일명(第一名)으로 합격하였다.

그 이후 이색은 서장관으로 재차(再次) 임명되어 3년 동안 유학하였던 베이징(北京)에 다시 가게 되었으며, 1354(공민왕 3)년 2월에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구양현(歐陽玄),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함께 관장한 회시(會試)에서 합격하였다. 이어 3월에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하여 제이갑(第二甲)의 제이명(第二名)으로 발탁되자 독권관(讀券官)인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彜),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 등이 이색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칙명(勅命)에 의해 이색은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다. 이와 같이 원나라에서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던 이색이 다시 본국(本國)에 귀환(歸還)하여 통직랑(通直郞)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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