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은행 위기 공포가 스위스를 거쳐 독일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도이치은행)까지 덮치며 세계에 검은 ‘뱅크데믹’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지난 주말 도이체방크를 비롯한 유럽 주요 은행의 주가가 급락했다. 뱅크런 사태를 겪었던 크레디스위스(CS)가 유비에스(UBS)로 인수되는 과정에서 160억 스위스 프랑(약 22조원)에 이르는 코코본드를 전액 상각하면서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가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코코본드를 비롯한 신종자본증권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금융회사들의 자본력 확충을 위해 도입한 것으로, 유사시 투자 원금이 주식으로 강제전환되는 조건이 붙은 회사채다. 도이체방크의 코코본드(AT1)는 ‘보통주자본(CET1)’ 대비 17.7%이다. 유럽 은행 평균(약 16%)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도이체방크는 10분기 연속 흑자를 내는 등 재무 상태가 건전하다며 코코본드 조기 상환 의지를 밝혔다. 특별한 부실 징후가 없는 대형 은행까지 표적이 된 것은 그만큼 투자자들의 공포가 극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뱅크데믹’이라는 말은 은행 위기가 코로나 팬데믹과 같이 전염병처럼 번진다는 뜻에서 은행과 팬데믹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이번 글로벌 은행 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와는 양상이 다르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은 주로 안전자산의 대명사인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도이체방크도 재무 건전성이 안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이번 위기의 본질이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한 금융시장 위축에 있기 때문에 당분간 신용 경색과 불안 심리가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절대적인 안전지대가 없다.

‘디지털 뱅크런’에서 보듯 공포 확산 속도는 매우 빠르다. 40년 역사의 SVB가 무너지는 데는 단 2일, 167년 전통의 CS가 몰락하는 데는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나라라고 안심할 수 없다. 국내 은행은 유럽과 달리 총자본 대비 코코본드 비중이 높지 않은 편이다. 금융 지주별로 신종자본증권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우리금융지주로 총자본의 9.29%를 차지한다.

국내 은행의 코코본드 발행 잔액은 31조 5000억원이다. 당장 영향은 크지 않지만 투자 심리가 불안해질 경우 자본 확충이 어려워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가뜩이나 한국 금융 시스템은 취약한 구조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부동산 경기가 냉각하면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계부채도 잠재적 위험요인이다. 자산을 모두 처분해도 빚을 갚기 어려운 고위험 가구가 1년 새 배로 늘어 61만 5000가구를 넘어섰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잠재된 위기가 현실화할지 모른다. 금융 시장 전체를 뒤흔들만큼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서 은행의 위기 관리와 정부 당국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대비한 투명한 정보 공유를 통한 신뢰 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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