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필리핀의 외교 노선이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고 있다. 현 대통령의 외교정책의 노선이 친미 노선으로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전임 대통령의 친중 노선과 대비된 외교정책으로 경제 실리적인 측면에서 다소 무리수라는 시각도 있다. 이와 관련해 본지는 보웃 티다 캄보디아 크메르라이프 발행인이 아사아 전문가들의 시각을 담아 분석한 기고문을 보내와 번역해 게재한다.

 

페르디난드 봉봉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출처: 로이터, 연합뉴스)
페르디난드 봉봉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출처: 로이터, 연합뉴스)

명백한 ‘친미’노선으로 보이지만

‘아시아 균형외교’ 전략적 행보

안보‧군사는 미국, 경제는 중국

강대국 사이 약소국의 생존전략

보웃 티다 캄보디아 크메르라이프 발행인.
보웃 티다 캄보디아 크메르라이프 발행인.

최근 필리핀의 급격한 미국 쏠림에 국제사회가 놀라며 예의주시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봉봉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해 6월까지만 해도 세계는 그가 전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친중’ 노선을 그대로 계승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선에서 당선됐다. 그는 20년 넘게 필리핀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했던 독재자의 아들이다. 아버지 이름을 따 마르코스 주니어로도 불린다. 그의 아버지 마르코스는 1986년 필리핀의 민주화운동으로 실각했지만, 집권 기간 내내 친미 행보를 지속하며 권력을 유지했던 인물이다. 재임 2년차를 맞이한 아들 마르코스가 필리핀 외교정책을 미국 쪽으로 확실히 쏠리게 만들자, 세계는 마치 아버지 마르코스의 장기독재를 가능하게 만든 미국의 지원을 연상케 한다고 말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필리핀의 위기’를 언급했다. 덧붙여 그는 “미국이 없는 필리핀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언급한 ‘필리핀의 위기’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을 말한다. 둘 다 미·중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현안으로, 그의 발언은 사실상 향후 필리핀이 미국 편에 설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친중→친미’ 필리핀 안보 노선

최근 중국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분쟁이 본격화되고, 미·중 패권전쟁이 심화하자, 마르코스 대통령은 과감히 노선을 바꿔 탔다. 올해 2월 미국과의 군사 합의를 본격화했다. 같은 달 2일 필리핀 정부는 미국에 자국 내 4개의 군사기지에 대해 추가적인 사용을 허용하는 중요한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미군의 거점은 총 9곳으로 늘었다. 이번에 포함된 필리핀 루손섬 최북단의 카가얀 기지에서 대만까지는 불과 400㎞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대만에서 600㎞가 넘는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비해 훨씬 가까운 거리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필리핀은 미국이 최단 거리에서 자국의 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미국과 중국 간 무력충돌시 일본이나 한국 내 미군기지시설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이 최전선 국가 중 하나가 될 수 있음도 시사한다. 중국 입장에선 국제관계에서 또 다른 적이 생긴 셈이다.

친중 성향의 전임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2016년 취임한 뒤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깨는 정책 기조를 견지한 가운데 중단됐던 남중국해 공동 순찰도 다시 재개키로 합의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필리핀 정부는 이것도 모자라 자국 수호 명분을 내세워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호주와도 방위 협정을 잇달아 체결했다. 이로 인해 미군은 필리핀군과 공동훈련을 실시하고, 필리핀 내 탄약과 연료를 비축해 둘 수 있게 됐다.

지난 2월 9일에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의에서 향후 양국 간 군사협력 원활화 협정(RAA)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이와 함께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인도네시아와도 안보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필리핀은 이미 지난 2022년 9월 인도네시아와 해양안보 강화를 위한 방위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마르코스 대통령 입장에선 매우 중요한 외교적 결단이지만, 이 같은 조치는 중국을 충격에 빠트릴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필리핀 외교 축, 미국으로 옮겨갔나

이처럼 재임 2년차를 맞이한 필리핀 대통령은 외교의 축을 중국이 아닌 미국 쪽으로 무게 중심을 확실히 옮겼다. 물론 독립·자주 외교의 일시적 실리변화인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의 외교정책 방향 기본 틀만큼은 완전히 잡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외교 전략은 노골적 반미감정을 드러냈던 전임 두테르테 대통령의 외교 행태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필리핀은 전통적으로 동남아 국가 중 가장 친미적인 국가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19세기 말부터 1945년 독립할 때까지 미국의 식민지배를 경험했기에,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1951년 미국과 필리핀이 공식적 동맹 관계를 구축한 이래 미소 냉전시대에도 필리핀은 미군에게 해외 최대의 해공군 기지를 제공했다. 냉전종식과 함께 1992년 미군기지 철수가 단행된 뒤에도 2014년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체결, 5개의 필리핀 기지를 미국에 제공하면서 꾸준히 우호동맹관계를 유지해왔다.

따지고 보면 전임 정권인 두테르테 정권을 제외한 역대 모든 필리핀 대통령들은 기본적으로 친미적 성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 국민 다수도 중국보다는 미국을 선호하는 편이다.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가 나빴던 두테르테 대통령 집권시절에도 미국에 대한 일반 필리핀인들의 호감도는 70% 수준을 상회했다. 따라서 마르코스 대통령 정부의 출범과 그의 전략적 선택은 전통적으로 친미적이었던 필리핀 외교안보정책으로의 귀환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의 이 같은 최근 외교행보는 중국을 난감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다만 중국 정부의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앞서 중국은 올해 초, 지난 1월 4일 마르코스 대통령을 국빈 초청하며 나름 공을 들인 바 있다. 양국 간 가장 중요한 현안이자 가장 민감한 문제인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제안한 공동자원 개발방안 등에 대해서 나름 해법을 도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양측 협상은 그야말로 평행선을 달렸고, 어떠한 진전된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에 나왔다. 이후 마르코스 대통령은 곧바로 노선을 갈아타는 결단을 내렸다. 미국에 추가적으로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일본과 준군사동맹 수준의 안보협력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전랑외교에 반기 들어

필리핀이 이런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 일부 국제정세 전문가들은 두 강대국 중 한 축을 차지한 중국의 영향력이 미국의 견제로 점차 약해지고 있다고 판단한 것도 이유라고 말한다. 작년 2월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초래된 신냉전 구도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 실추와 영향력 감소에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지난 3년간의 코로나 기간 역내 중국 영향력의 근원이었던 중국경제가 최정점을 지나 하락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타국을 배려하지 않는 전투적인 전랑외교(늑대외교, 늑대전사외교)와 가난한 나라들을 더욱더 깊은 부채의 늪에 빠뜨린 시진핑 정부의 일대일로 정책도 아세안 국가들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고 국제정세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국이 마오쩌뚱 시대를 거치면서 세계경제의 변방으로 취급받던 나라를 기회의 땅으로 만들고 세계경제 성장을 견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0년 냉전시대 붕괴 이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더불어 중국은 ‘세계공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1979년 덩샤오핑이 언급한 의식주 문제가 이 무렵 완전 해결이 됐고, 전 국민이 문화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소강사회(小康社會)를 2020년 마침내 맞이했다. 그러나 중국의 성공적인 경제발전은 미국의 질투를 낳았고, 중국을 ‘추격자’ 또는 ‘패권도전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시진핑 정부가 앞세운 일대일로(一带一路) 정책사업과 남중국해 진출은 미국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팽창주의정책과 아세아 지역에서의 영향력 강화가 또 다른 갈등의 축으로 진화한 셈이다.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은 강력해진 국력을 무기 삼아 주변국들을 압박하며 타협과 수용보다는 자국의 핵심이익을 강요하고 심지어 무력과 보복이라는 전랑외교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주변국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팽창정책은 동북아에서 군비경쟁과 대만 위기 더 나아가 미중 간 패권전쟁의 양상으로 이어졌다.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필리핀에겐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위협이 됐다.

◆중 ‘경제무역 실리’도 포기 못 해

그렇지만 필리핀은 현실적인 이유로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국민의 삶과 직결된 경제 협력의 끈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무역 분야에서 최근 몇 년간 중국의 대 필리핀 투자액은 4배, 양국 무역액은 2배로 증가했다. 또한 중국은 필리핀의 제1 무역 파트너이자, 제1 수입원 및 제2 수출 목적지이다. 그 외에도 양국은 지난 수년간 전염병 방역, 재난 구호, 인프라 건설, 농업 등 많은 분야에서 거의 40개에 이르는 정부 간 협력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바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기존 외교 노선에서 탈피, 중국의 남중국해 위협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산업 교류는 활성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가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자극하는 정치적 메시지도 최대한 자제하고 피하려고 애쓴다.

사실 최근의 마르코스 대통령의 미국 쏠림 외교는 세계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동안 다른 아세안 국가들이 해온 대외정책과 큰 맥락에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필리핀의 노선 변경도 사실 따지고 보면 미중 세력 간 균형을 적적히 활용함으로써 ‘강대국’ 또는 ‘강대국 전략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남은 과제는 어떤 방식으로 중국과의 해묵은 남중국해 문제를 풀고, 중국의 투자와 경제 협력을 이끌어내느냐 하는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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