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응 열사 순국 110주년을 하루 앞둔 11일 ‘이한응 열사의 구국 외교활동과 순국’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이화여대 구대열 명예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11일 이한응 열사 순국 11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개최

[천지일보=이경숙 기자]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을 잃으니, 무룻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으리오. 슬프다! 종사가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겨레가 모두 남의 종이 되리로다. 구차히 산다한들 욕됨만이 더할 따름이라. 이 어찌 죽어짐보다 나으리오. 뜻을 매듭지은 이 자리에 다시 이를 말 없노라.”

▲ 구한 말 외교관 이한응(1874~1905)
1900년대 초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순국한 젊은 외교관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 열사의 유서다.

그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자 31살의 젊은 나이로, 민영환보다 5개월 앞서 순국하기에 이른다. 이는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 최초의 순국으로 알려졌다.

이한응 열사는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군수인 이경호(李璟鎬)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5살부터 전통 유학과 한문을 배우다가 15살 되던 해인 1889년 서울로 올라와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한다. 이한응 열사는 영어·수학·자연과학 등 신식학문을 접하며, 후일 외교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1901년 3월 대한제국 정부는 문호개방 이래 유럽 열강들과 관계에서 처음으로 민영돈을 영의(英義, 영국과 이탈리아 겸임) 상주공사로 임명한다. 이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간의 각축이 심각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때 이한응은 민영돈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3등 참찬관(3등 서기관)으로 임명받아 런던으로 부임한다.

이후 1904년 이한응은 민영돈을 대신한 서리공사직을 맡아 국제정치의 중심무대 중 하나였던 런던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의 외교관계를 관찰하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쌓게 된다.

국제정세를 읽고 있었던 그는 러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한제국이 승전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될 것을 예견하고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한응 열사 순국 110주년을 하루 앞둔 11일 ‘이한응 열사의 구국 외교활동과 순국’이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이화여대 구대열 명예교수는 “이한응 열사의 제안은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범세계적인 차원의 세력균형과 연결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유지해보려는 탁월한 발상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어 구 교수는 “물론 현실적인 권력정치에서 실현 가능성은 없었지만 최소한 국제정치에 대한 그의 식견은 오늘날 외교관들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다.

1904년 2월 8일 예견했던 대로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한국은 순식간에 일본의 군사적 지배아래 놓이게 된다. 결국 일본은 신속히 서울을 비롯한 군사적 요충을 점령하고, 2월 23일 제1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된다.

이한응은 한반도 독립을 위해 열강을 상대로 외교협상을 펼치는 데 주력했으나 결과는 그를 낙담하게 만든다. 1905년 5월 12일 이한응은 공사관에서 목을 매 자결한다. 한국의 독립을 지키려 처절한 외교활동을 펼쳤던 그의 공로가 인정돼 한국에서 순국 제1호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항일 저항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그가 펼쳤던 한반도 중립화 방안은 약육강식 세계의 서구 열강들을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한반도의 독립과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외교전은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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