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성산대로 고가다리 건설로 인해 독립공원(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내에 옮겨진 모습. 육로로는 한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무악재 고개를 바라보고 건립돼 중국 사대외교로부터의 독립을 알리는 것이 당초 독립문에 담긴 의미였다. 그러나 현재는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는 형국이 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전(移轉)으로 치명적인 오점 남겨
성산대로 고가도로 공사에 떠밀려 옮겨져
내재된 의미 상실, 단순 건축물 불과
공무원의 신중치 못한 무식한 행정
역사의식 부재와 무지가 낳은 결과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국내외 관광객, 혹은 시민들이 독립공원(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을 찾아 하늘 위로 늠름하게 뻗어 있는 독립문(獨立門)을 관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는다.

외형적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이 독립문(사적 제32호)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원래의 위치에서 무악재를 바라보며 중국 사신을 맞이해 ‘사대(事大)’ 외교로부터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건립된 건축물이, 성산대로 고가 공사에 떠밀려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서대문형무소를 향해 바라보는 형국이 됐다.

문화재(유형)는 그 안에 내재된 의미와 함께 할 때 건축물로서 가치가 있다. 허나 그 의미가 원래대로의 의미를 상실해버렸다면 그 문화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단순한 건축물에 불과한 사상누각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그럼 독립문에 담긴 원래의 의미와 현재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사대외교로부터 독립 선언 ‘독립문’

▲ 무악재를 넘어오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자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건립한 영은문의 모습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시대 중국은 우리가 섬기는 ‘사대(事大)’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건립한 것이 영은문(迎恩門)이다. 이는 중국황제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대주의 정치의 표상이었다. 영은문은 무악재를 향해 바라보고 건립됐다. 이는 중국이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 가는 유일한 육로가 무악재였기 때문에 중국사신을 성대히 맞이하고자 세운 것이다.

이를 일제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의주로 향하는 시작 관문(당시 전신주가 의주까지 뻗어 있었음)이었던 영은문을 헐었다. 이후 50m 정도 앞쪽에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문이 건립된다. 중국(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해 영은문 앞쪽에 1896년 준공, 1897년에 완공된다. 그래서 중국에서 사신이 들어올 때는 한자로 써 있는 독립문을 보게 되며, 반대로 나갈 때는 한글로 된 독립문 글자를 보도록 했다. 아울러 영은문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인 두 개의 돌기둥도 지나가게 함으로써 중국은 더 이상 우리가 상국(上國)으로 섬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도록 했다.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 지었다?

▲ 영은문이 돌기둥만 남았고, 그 50m 앞쪽에 독립문이 세워져 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두산)이나 독립문 현장 안내판에는 영은문을 없앤 터(영은문 안내판)에 또는 영은문 자리(독립문 안내판)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표기돼 있다. 독립문은 영은문이 있던 터의 50m 가량 떨어진 앞쪽에 지었던 것이지,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웠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이다.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으로부터 단독 입수한 옛 독립문 사진을 봐도 명백히 알 수가 있다.

정 관장 역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표현을 지적했다. 그는 “사진이 명백하게 증명해 준다. 사대사상에 깃든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말하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같이 잘못된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독립문 안내판에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됐다’는 잘못된 설명이 표기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영은문 안내판에 ‘영은문을 없앤 터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역시 잘못된 설명이 표기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무악재 바라보던 독립문 본래 의미 퇴색돼

독립문의 본격적인 오류는 1979년 성산대로 고가 공사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면서부터 시작됐다. 독립문은 반청(反淸)의 상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치문이 무악재를 바라보도록 지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곧 청나라가 한양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육로통로인 무악재를 넘어와야 했기에 무악재를 바라보고 지은 것이 독립문에 내포된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독립문은 더 이상 무악재가 아닌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식민지의 상징 건물이다. 반일(反日)과는 아주 연관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본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 독립문 아치문이 무악재를 바라보도록 건립된 옛 모습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에 대해 정성길 관장은 “신중하지 못한 채 함부로 문화재를 옮기고 말았다. 그리고 옮겨도 이상하게 옮겨 놨다. 옮긴 것도 잘못이지만 방향도 아무 의미도 모른 채 옮기고 말았다. 이는 무식한 행정처리”라고 분통해했다.

이어 정 관장은 “그간 수십 년 전부터 문화재청이나 서대문구청 관계자에게 수차례 이 문제를 얘기했으나, 그들은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냐는 반응만 되풀이했다”고 말하며 공무원들의 역사인식 부재에 안타까워했다.

문화재는 선조들이 혼을 갖고 세운 목적과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옮기지 않는 게 도리다. 일제는 과거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옮기며 우리나라를 우롱한 바 있다. 광화문의 세 개의 문 중 한가운데 문은 임금만이 드나들 수가 있는 곳이었고, 나머지는 문관과 무관의 신하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만큼 위엄이 있는 정문을 일제는 왜곡시키려 했다.

광화문이 현재의 위치로 복원이 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광화문은 아무런 역사적 가치도 없는 사상누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위치로 되돌아오면서 광화문의 본연의 기능과 의미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독립문도 이와 같은 이치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 과거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는 전체 차로로 이용되고 있고, 그 위로 성산대로 고가도로가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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