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2)

“나는 참된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하기로 맹세하나이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집에서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면서 김구 단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왕 처단의 의지를 이같이 밝혔다.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이봉창 의사는 용산 문창보통학교(지금의 효창초등학교)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4년 만에 졸업하고 19세까지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 노릇을 했다.

그후 1918년 용산역에서 기차운전견습생으로 일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강렬한 민족의식을 함께 형성하면서 조국 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이후 그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6여 년 동안 나고야 등지에서 힘든 막노동을 하며 일본어를 익히고 국내외 정세를 엿보다가 1931년 1월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인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과 흡사해 임시정부 요원들은 그를 의심했지만, 김구는 그를 유심히 살폈고 그와 대화를 나눈 후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이 의기남자(意氣男子)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할 결심을 갖고 임시정부를 찾아왔다고 하면서 “나는 이 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이봉창은 김구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일왕의 암살을 자원해 1년 이내에 이를 실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후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일본 사쿠라다 문 밖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그는 일왕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고, 그 자리에서 품안에 있는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3번 외친 뒤 체포됐다.

현장에서 검거된 이봉창은 천황을 위해하려 했다는 ‘대역죄’를 선고받고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봉창의 유해는 일제 해방 후 1946년 2월 19일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고국에 돌아왔으며, 1962년에는 이봉창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벌어진 일로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침략의 원흉이자 수뇌인 일왕을 근접거리에서 직접 처단하려 한 것은 이봉창 의거가 갖는 가장 큰 의의라 할 수 있다.

비록 폭탄의 위력이 약해 이봉창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한국인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와 염원은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이 의거는 당시 침체돼 있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고, 중국정부와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더 나아가 ‘결코 일제에 굴복할 수 없다’는 항일정신과 독립의지를 민족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줬으며, 우리 민족이 ‘용기 있는 민족’이란 사실을 전 세계에 증명해 보였다.

▲ 이봉창 의사 선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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