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 (1)

“여러 의사들이여! 여러 의사들이여! 오늘의 일은 대한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길이요, 우리 2천만 국민의 생사에 관한 문제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바라건대 결사적인 의지로 이 5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쓸어버리면 우리는 물론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살 수 있으나, 그 성패가 오늘에 달렸으면…”

1907년 서울에서 5적 암살계획을 세우면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던 대한민국의 운명을 놓고 결연한 독립운동의 의지를 드러낸 나철 선생의 말이다.

대종교의 중광조(重光祖)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나철 선생은 1863년(철종 14년)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으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徵稅署長)의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했다.

이후 그는 1904년 오기호(吳基鎬) 등 호남출신 우국지사들과 함께 유신회를 조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평화를 위해 한·일·청 삼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는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항쟁을 펼쳤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을 제거하려 했으나 삼엄한 경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치적 구국운동이 계속적으로 좌절을 겪자 평소 한얼님(하나님, 하느님)을 믿으며 항일 투쟁을 해온 나철 선생은 1910년 일개 교인으로 입교해 맥이 끊긴 대종교를 부활시킨 인물로서, 대종교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동력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나철 선생이 이끄는 대종교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와 비타협적인 노선을 걸으며 만주로 망명해 30만의 신자를 확보하고 10여개소의 학교를 세워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독립운동에 힘썼다.

또한 대종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4도본사를 나누고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는데, 이는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기 때문에 옛 강토이자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종교적 가르침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세운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시대적 명제는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됐으며, 1915년 총본사를 백두산 기슭인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므로 만주지역에서의 무장항일운동의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

대종교의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安)을 공포하여 대종교를 불법화 했다. 이후 홍암 나철은 1916년 구월산에서 순교하게 되고, 홍암 사후 무력투쟁(혈전주의)으로 전환돼 무장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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