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ARS 여론조사 전화가 공해를 넘어 폭력에 가깝다. 불청객이요, ‘짜증 제대로. 퇴근해 쉬고 있을 때는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 싫다. 내심 받기 싫은 전화지만 시끄러운 벨소리에 마지못해 받아보면 ARS 기계음이 똑같은 말만 또 반복한다. 서울 시민인 필자에게 과천 지방선거 여론조사라니. 여러 번 쓸데없는 전화가 걸려왔지만 ARS 기계음에 항의할 수 없어 그냥 수화기를 놓고 만다. 귀찮은 전화가 더 이상 안 걸려오기만을 기대하며. 전화 거는 주체를 찾아 따지기조차 번거롭다. 열 차례 가까이 걸려온 전화에 참다못해 발신 회사 이름을 메모해뒀다가 114에 문의해보니 그런 업체가 없단다. 인내심으로 짜증을 억누르고 홈페이지까지 찾아 업체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ARS로 저에게 자꾸 전화를 하는 겁니까? 응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으니 다시 걸지 말아주시죠.” “무작위로 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설문이 경기도 과천 지역 출마자에 관한 것이던데제가 몇 년 전 살던 곳이 과천이니 제 신상정보가 귀하 회사에 노출된 것 아닌가요. 도대체 어떤 경로로 제 전화번호를 입수한 것인가요.” “죄송합니다.”

사후약방문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긴 것이 억울할 따름이다. 법적으로 문제 삼기도 그렇다. 물론 여론조사의 순기능이야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내용에 따라 꽤 흥미롭고 유익한 조사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설문 문항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조사결과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 예컨대 북한핵문제에 관해 여론조사를 실시한다고 하자. ‘북한이 4차핵실험을 단행할까요? 아니오, 우리나라도 핵을 보유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오.’ 여기에 조금만 글을 고치면 설문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뀐다. 다음과 같이. ‘4차핵실험을 공언한 바 있는 북한이 앞으로 핵실험을 단행할까요? 아니오, 북한이 도발을 계속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과거 노태우 대통령이 선언한 한반도비핵화선언이 옳았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오, 북한이 핵개발을 계속하며 주변국에 핵개발 명분을 쌓아주고 있는 데도 불구, 일본과 한국은 계속 핵 보유를 회피하는 것이 좋을까요? 핵보유를 포기해야 핵을 보유해야.’

이처럼 설문내용에 따라 조사결과는 다를 수 있다. 문제는 밴드웨건효과에 의한 여론의 왜곡. 대중은 특정 테마에 대한 의견을 아직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접하는 여론조사결과에 편승하게 되는 수동성이 있고 이 부분이 악용될 수 있다. ‘대세유행을 무기로 대중조작을 하는 정치주체에게 민심이 농락당하기 쉽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어느 정치인 어느 정권이 여론조작의 힘을 빌려 당선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조작 당사자만 아는 일이다. 그간 여론조작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 깃발만 꽂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선거구는 수두룩하다. 공천이 곧 당선이나 마찬가지인 지역 등에서 유혹이 거세다. 금전과 이해관계, 직책 등 대가가 반드시 오가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거 승리의 전리품이 워낙 큰 탓이다.

전화 여론조사는 응답거절률이 높다. 가정집 전화는 응답자 중 가정주부의 비율이 크다.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휴대전화 없는 저소득층이나 고연령층의 의견이 배제되는 문제점이 있다. 뿐만 아니다. 착신전환이나 허위사실유포 등을 통한 여론조작 사례도 많다.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결과라고 전제, ‘’ ‘두 후보의 지지율을 SNS로 보낸 내용이 허위사실로 확인돼 현재 형사재판중이다. 민심을 왜곡하는 중대 범죄인 데도 법원은 1, 2심 판결이 유무죄로 오락가락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얼마 전 실시한 기초선거 공천여부 국민여론조사도 설문의 가치중립성이 훼손됐다는 논란이 있었다. 설문 내용이 정당 공천 찬성 쪽으로 유도하는 쪽으로 치우쳐졌다는 것. 사전에 시뮬레이션도 두 차례나 거쳤으나 결과가 딴판이어서 안철수 공동대표가 정치 꼼수에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새누리당 제주지사 경선과 새정치민주연합 경기지사 경선 등을 앞두고도 여론조사 방식이나 반영비율 등을 놓고 후보자 간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확성이 담보되지 않은 여론조사가 작금 턱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원인은 정치권이 여론조사에 목을 매달다시피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정당정치가 엄연히 제도화된 상황에서 여론조사가 정당 의사결정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돼야 하느냐는 의구심이 든다. 특정후보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변수로 작용한다면 제도적으로 완벽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기술적으로 여론조사 기법의 정밀성을 얼마나 갖출 수 있는지 의문이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왜곡하면 선거민주주의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지만 과연 제도적 대안이 있는지 궁금하다. 여론조사의 권력화는 아무래도 오버인 것 같다. 유권자들로부터 신뢰가 땅에 떨어진 지도 이미 오래 아닌가. 여론조사에 목숨을 거는 정치권을 딛고 서서 권력의 제5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는 허점투성이 여론조사를 이대로 두어도 좋은가. 정치권 스스로 전면 재검토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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