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무기와 안보(2)-베트남 지압 장군(Vo Nguyen Giap)이 가르치는 것

최상현 주필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해 차례로 승리를 거둔 북베트남 호치민 인민군의 첫 출발은 참으로 보잘 것이 없었다. 첫 출발의 해는 1944년이다. 인원도 적었지만 그들이 가진 무기라는 것도 구식 보병용 부싯돌 수발 총이 전부였다. 본래 역사 선생이었던 지낸 지압 장군이 그들의 훈련관이었다. 지압은 무기에 의존해 싸우는 기술보다 정신 훈련과 정신 무장, 그러니까 그들 식으로 말하는 ‘이념’ 주입을 중점 과제로 삼았다. 어차피 무기가 보잘 것이 없는 형편이므로 이는 상황이 강요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압은 동시에 그들 인원들이 삶의 근거지로 삼는 마을 농민들을 교육시켜나갔다. 이를 위해 ‘프로파간다(Propaganda)' 조직들을 만들어 운영했다. 이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쓰던 공산 혁명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김일성도 그렇게 했다. 지압은 프랑스 나폴레옹의 신봉자일 뿐 아니라 모택동의 전법에도 밝았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 아주 초라하게 출발한 지압의 군대는 급기야는 세계 최강의 정신 전력을 갖춘, 세계 최강의 게릴라 세력이 된다. 그들 게릴라 전투 세력은 인민이 군인이고 군인이 인민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누가 군인이고 인민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땅에 의존해 땅을 가꾸며 산다. 그렇지만 적의 공격을 받으면 땅 속으로 사라진다. B52 폭격기의 융단 폭격과 밀림을 불태우는 소이탄, 풀과 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고엽제의 공격에도 그들은 땅굴의 미로(迷路)에 몸을 숨김으로써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공격이 주춤해지면 불쑥 나타나 기습을 가하고 또 사라진다. 공세를 취하는 측에서 볼 때 잘 훈련된 정규 군대와 한 판 붙는 것은 차라리 쉬운 싸움이지만 이 같이 신출귀몰하다시피 하는 게릴라 세력과의 싸움은 명확한 승리를 기약할 수가 없는 속성을 지닌다. 미국이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게릴라 세력과 벌이는 싸움 역시 그런 싸움이다. 게릴라들은 자기 땅의 지형적 특성을 잘 안다. 그것을 한껏 활용해 무한한 인내심으로 싸운다. 바로 지압의 군대가 1944년부터 시작해 1975년 미군이 떠날 때까지 30년 동안 그야말로 한계를 뛰어넘는 인내심으로 싸웠다.

지압은 말했다. ‘혁명을 하는 데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적이 내일 무슨 일을 어떻게 꾸미고 벌일 것이냐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래의 앞날에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일찍이 미국이 끝내는 국내의 반전 여론에 굴복할 수밖에 없으며 군대를 철수하고야 마는 베트남 ‘해방’의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같은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통찰이 그들을 강인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압은 그들과는 다른 체제인 민주국가의 여론 정치의 허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지피지기(知彼知己)에 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국가의 여론은 남의 나라 땅에서 자국민의 희생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지루한 전쟁을 견디지 못한다.

지압은 ‘3불(三不)’ 전략에 의해 ‘적이 좋아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 1954년 프랑스 군대와의 디엔 비엔 푸 전투뿐만 아니라 1968년 미군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가한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그 같은 지압의 전략이 반영된 대표적인 싸움이다. 베트남의 구정은 한국이나 중국에서와 같이 국민 모두가 들떠 즐기는 전통적인 대명절이다. 이 때 일하는 것은 상식 밖이다. 지압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명절 분위기에 긴장이 풀린 미군에 기습을 가했다. 괜히 남의 잔치에 헛눈을 팔고 고향 생각이나 하면서 마음을 놓았다가 미군은 허를 찔렸다. 미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여론이 월남전에 대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전쟁은 첨단 무기나 물량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월등한 국력과 군사력을 가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엄청난 물량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효율은 그에 크게 못 미쳤다. 그것은 왜 싸워야 되느냐는 목적의식의 결핍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패권(覇權) 유지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남의 나라 땅에서, 남을 위한 싸움에서 사생결단을 하거나 올인(All in)할 정신력은 없었다. 미군은 전쟁의 프로이면서 막강한 군사력은 보유했지만 그 점, 바로 소프트웨어의 측면에서는 애초부터 지압의 인민군 게릴라들에 지고 들어간 셈이다. 이로 보아 지압 장군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국가 안보는 남의 힘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할지라도 남에게만 내맡겨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바로 이 같은 보편적인 가치이다.

지압과 호치민의 만남은 이들이 중국에 피신해 있을 때다. 이들은 그곳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고국에서 서로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지압은 호치민을 깊이 존경하게 됐다. 호치민의 트레이드마크는 덥수룩한 수염, 흰 고무신이나 흰 고무 샌들, 다림질이 안 된 꾸깃꾸깃한 허름한 옷차림이다. 그는 입는 것,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거하는 집과 잠자리까지 가난한 일반 농민의 소박하고 누추하기까지 한 그것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홀아비로 일생을 마쳤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머리맡에는 조선(朝鮮)의 대학자 정약용의 한자 본(漢字 本)인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놓여있었다. 목민심서가 그의 애독서였다.

옛날 임금들은 난리가 나 신변이 위태로워지면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을 가진 피난, 즉 처첩과 왕자들, 신하 및 시종을 줄줄이 이끌고 ‘몽진(蒙塵)’을 떠났다. 호치민은 이 같은 비겁해 보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도 일반 농민 게릴라들처럼 땅에서 살고 폭격기가 습격하면 땅 속으로 숨어 버티었다. 그가 지압 장군과 인민들에게 추앙 받은 까닭이다.

특히 지압 장군에게 호치민은 우상(Idol)이었다. 지압은 겉으로 보아 생글생글 맨날 웃고 있지만 그의 심지(心地)는 ‘눈 밑의 화산’과 같이 뜨겁고 강했다. 그런 지압을 호치민은 그의 동지들이 시기할 정도로 철저히 신임하고 능력을 높이 샀다. 그들은 찰떡궁합이었다. 호치민과 지압, 이 두 거인의 숙명적인 인연과 그로 인한 만남으로 베트남은 외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또한 세계가 달라질 수 있었다. 이들의 경우로 보아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 그것은 사람과 세상을 만들어가는 신비이며 불가사의인 것이 틀림없다.(더 이코노미스트 2013년 10월 12일자 참조)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