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궁녀 눈물에 가려진 백제 멸망의 진실(4)
삼천궁녀 눈물에 가려진 백제 멸망의 진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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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가르쳐준 한 가지, 복수보다 중요한 것
▲ 황산벌 전투 전적지 ⓒ천지일보(뉴스천지)

나제동맹을 저버리고 왕을 죽인 원수를 갚고, 한강을 회복하는 일은 백제왕들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인 과제였다. 그러니 성왕 이후 87년이 지나 즉위한 의자왕 역시 왕이 되자마자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했다. 끊임없는 정복전쟁이 가능했을 만큼 안정적인 국정 운영도 뒷받침되어줬다. 의자왕 당시의 국력은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탑의 탑신 기단부를 자세히 보면 당나라 소정방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쓴 전승기념문인 ‘大唐平濟國碑銘(대당평제국비명)’이 빼곡히 새겨있다. 그 가운데 백제의 인구가 5도독 37주 250현 24만 호 계산한 즉, 620만 명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 수가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어쨌든 새겨진 인구수를 통해 백제가 강성한 국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제공격도 백제, 승리도 백제…. 642년 의자왕은 경남 합천 지역에 있는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 김춘추(신라 29대 왕)의 딸과 사위가 죽게 된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서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백제를 큰 나라요, 자신들을 작은 나라에 비유했던 신라가 대야성 전투 참패를 계기로 백제 정벌의 뜻을 세우게 된다.

김춘추는 당의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해 신라의 제도와 연호, 복식을 모두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는 등 사대외교정책을 전면에 내세웠고 적국이었던 고구려에까지 협상을 제안했다. 당나라가 신라와 군사연합을 맺었을 초기까지만 해도 백제는 당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해마다 조공과 사신을 보내며 우호관계를 다져왔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숨은 야욕이 있었다. 때마침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나라는 신라를 이용해 백제를 정벌한 뒤 고구려를 치고 나아가 한반도 전역을 통치하려는 욕심으로 백제 대신 신라를 택했다.

▲ 황산벌 전투 전적지 ⓒ천지일보(뉴스천지)

격동의 동북아시대, 신라 김춘추는 사활을 건 대당외교를 펼쳐 당시 초강대국 당나라를 우군으로 만들었고 이런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백제는 당나라의 노골적인 신라 편들기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는 주문에 당혹해하다 652년에 당나라와 관계를 청산하고만다. 그로부터 8년 후인 660년 13만의 당군과 5만의 신라군 합이 18만 대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당군은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사비로 가기 위한 최후의 관문 황산 앞 벌판에서 백제의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신라군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된다.

계백은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전했고, 장군의 정신을 따라 5천 결사대 역시 치열한 사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사비성으로 가는 길은 뚫리고 결국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박미혜/ me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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