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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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가 일시 몸을 의탁했던 금강산 시계사와 집선연봉 (출처: 김영택의 펜화기행) ⓒ천지일보 2023.02.08

홍범도는 1868년 음력 8월 27일 평양 보통문(서문) 안 문열사 앞마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홍윤식(洪允植)은 머슴, 어머니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홍범도는 홀아버지 밑에서 동네 젖을 먹고 자라야 했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 평양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평양감사 박규수를 비롯한 관민의 분노를 사서 불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홍범도의 생애가 나라의 운명과 함께 외세의 침략으로 격랑에 휩싸일 것을 예고했다. 

3살 때인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 침몰의 보복으로 미국 군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신미양요, 4년 뒤 일본의 운요호 사건 등으로 이듬해 조선이 개항했다. 그리고 1877년 홀아버지마저 병으로 돌아가 홍범도는 고아가 되었다. 평양 근처 숙부 집에서 농사를 도우며 몇 년 살았다. 그러다 독립하고자 근처 부잣집의 꼴머슴이 되었다.

만 15살 되던 1883년 평양 감영에서 나팔수를 모집하자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평양감영 우영 제1대 나팔수가 되었다. 4년을 근무했다. 머슴노릇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당시 군대는 부패했고, 병사들에 대한 군교(장교)의 학대가 심했다. 갈등이 왔다. 어느 날 부패한 군교와 시비 끝에 상관을 구타했다. 처벌을 피해 병영에서 도망했다. 갈 곳이 없었다. 홍범도는 전에 이야기 들었던 황해도 수안 천곡에 있는 종이공장 막일꾼으로 숨어들었다. 

동학의 간부인 사람이 주인이었다. 1년이 지나자 건장한 홍범도를 눈여겨본 주인은 홍범도에게 동학 가입을 권유했다. 2년이 되자 “동학에 들지 않으면 임금을 주지 않겠다”고 압박했다. 일곱 달 품삯이 밀렸다. 주인은 “동학에 입도하면 품삯을 주겠다”며 “동학에 들지 않으려면 아예 나가라”고 협박했다. 

“내가 죽어도 동학에 들어갈 생각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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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출신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대한독립군) ⓒ천지일보 2023.02.08

홍범도는 그러한 강압 때문에 동학에 가입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인과 다투다 주먹으로 그를 쓰러뜨리고는 박차고 나왔다. 정처 없는 발길이 금강산으로 향했다. 금강산 신계사 지담(止潭)대사를 만나 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수도하는 상좌(上佐)가 되었다. 

홍범도는 절에 들어온 지 1년가량 되었을 때 한 여승을 만났다. 근처 비구니들 절에 있는 북청 출신 단양 이씨라는 여승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1892년 여름 두 사람은 신계사를 떠나 속세로 내려왔다. 그러나 원산 부근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생이별을 했다. 다시 혼자가 된 홍범도는 먹패장골이라는 금강산 부근의 깊은 산골에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사냥을 하기도 하며 3년을 지냈다. 

홍범도가 있는 심심산골에까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왕후 민씨의 참살, 각지의 의병 봉기 등의 소식이 들려왔다. 만 27설 장년이 된 홍범도는 1895년 음력 8월 추석을 지나고 골짜기를 나왔다. 양력 11월 4일 금강산 장안사에서 철원의 금성 방면으로 오는 길에서 황해도 서흥 출신의 김수협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해발 685m의 철령 험지에서 일본군 소부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기회가 오자 공격을 가하여 일본군 10여명을 몰살시키고 무기를 노획했다. 함경도 학포로 이동하여 12명의 의병 동지를 모집해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안변의 석왕사에 근거를 두고 유명한 의병장이던 유인석 의진에 합류했다. 세 차례 전투를 치렀다. 유인석 의병부대는 명망과 의기는 있었으나 실질적인 전투력이 없었다. 동지들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도망갔다. 혼자가 되어 유인석 의진을 떠나 다시 방랑자가 되었다. 

1896년 홍범도는 신분을 숨기고 원산 가까운 황해도 곡산 하도면으로 가서 금광 노동자로 일시 피신했다. 함경남도 덕원읍의 친일파 전성준을 처단하고 빼앗은 돈으로 평안 함경 황해 접경의 산속을 떠돌며 홀로 활빈당처럼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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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금강산 시계사 ⓒ천지일보 2023.02.08

1897년 그는 전에 금강산에서 만났던 이씨의 고향 함경남도 북청으로 갔다. 사냥과 농사일을 하며 틈틈이 수소문했다. 마침내 헤어진 지 7년 만에 단양 이씨를 찾았다. 북청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몇 년간 사냥과 농사일로 가족과 함께 모처럼 평온한 생활을 했다. 1905년 그가 사는 북청의 안산사라는 지역의 사냥꾼 조합인 포계(砲契)의 대장으로 추대됐다.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에는 정미 7조약, 광무(고종)황제 강제 양위, 군대 해산이 있었고, 경찰권과 재판권도 일본이 빼앗아갔다. 국권은 허울만 남았다. 

홈범도는 산포수 70명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북청의 해발 1335m 험준한 후치령을 거점으로 매복 작전을 벌여 일본군을 습격해 무기를 노획하고, 11월 25일에는 일본 군경 70여명과 3시간 동안 격전 끝에 30여명을 살상하는 등 잇단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고 무기, 탄약 등을 노획했다. 

1908년 1월에는 함남 정평 의병과 합세하여 300명의 대병력으로 갑산수비대, 경찰관주재소 등을 습격하여 ‘나르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17일 동지 차도선이 일본군의 공작에 넘어가 의병 200명을 이끌고 일본 수비대에 귀순했다. 일본군은 홍범도마저 귀순시키기 위해 부인 이씨와 두 아들을 인질로 잡고 투항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홍범도는 5월 중순까지 일본군과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인질이 된 아내 이씨에게 홍범도의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도록 강요했다.

“실끝 같은 내 목숨 없어지면 그뿐, 내가 글을 쓴다고 영웅호걸인 내 남편은 나같은 아녀자의 말을 곧이듣지 않는다. 나는 절대로 글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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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일본군의 모습 ⓒ천지일보 2023.02.08

발가락에 불을 붙이는 등 고문을 가했다. 그해 5월 한 달 동안 8차례나 아내가 쓴 것처럼 하여 편지를 보냈다. 아내 이씨는 끝까지 저항했다. 일제는 인질로 붙들고 있던 아들 양순에게 편지를 주어 보냈다. 홍범도는 귀순 편지를 가져온 아들에 대노했다. 

“이놈아 전날에는 네가 내 자식이었지만 네가 일본 감옥에 3~4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주고자 하는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 하겠다!” 

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부관이 뛰어들어 제지하는 바람에 탄환이 귀를 스쳐 귀가 떨어져 나갔으나 목숨은 건졌다. 홍범도가 단순 무식한 포수가 아니라는 것을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다. 

1908년 5월 중순 아내 이씨가 일제 주구배의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6월에는 첫아들 양순이 일본군 토벌대와 싸우다 전사했다. 1908년 말까지 함남 장진 달아치 금광의 습격, 안중근 100명 의병과 연합작전 등 전투를 치렀으나 점차 일제군의 공격 앞에서 계속 항전하기 어려워졌다. 11월 2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통화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는 사이에 홍범도는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사가 되었다. 1910년 6월 21일 유인석 의병장이 연해주 13도 의군, 그해 8월 일제의 한국 병탄을 성토한 성명회(聲明會) 선언,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의 색깔을 뺀 권업회를 창립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11년 11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이범석, 엄인섭 등 20명과 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의하고 1912년 가을에는 노동회를 결성, 회장이 되어 연해주의 시베리아 철도공사장에서 노동으로 군자금 비축, 무기와 탄약의 구입을 하며 다가오는 투쟁을 위해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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