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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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연합은 작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 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 러시아 은행이 서방의 은행간 국제 결제 시스템(SWIFT)에서 축출됐고, 러시아에 대한 수출입 제한 또는 금지 조치도 취해졌다. 신용평가기관 S&P는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을 BB+에서 SD(신용등급 최악), 무디스와 피치는 등급을 6단계나 각각 낮췄다. 제재 폭격을 맞은 루블화의 가치 폭락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9.5%에서 20%로 대폭 올렸으며, 러시아의 국채 가격은 액면가의 10% 이하로 폭락했다. 그리고 상당수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조업을 중단했다.

2022년 러시아의 국내총생산 성장률에 대해 지난해 3월 국제금융협회(IIF)는 기존 전망치인 3%보다 18%포인트 낮은 마이너스 15%로 추락할 것으로 내다봤고 제이피 모건과 골드만삭스는 마이너스 7%, 그리고 블룸버그는 마이너스 9.6%로 예상했다. 7월에 들어서는 더욱 암울한 진단이 나왔다. 제프리 소넨펠드 예일대 교수는 대러 경제 제재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면서 러시아의 경제는 애초 우려했던 수준보다 훨씬 심각한 재앙적상황에 직면했다고 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떠난 결과 러시아 국내총생산의 40% 수준과 일자리 100만개를 잃었으며 이는 소련 붕괴 이후 외국인 투자를 통해 성장해 온 러시아의 시장 경제를 30년 전으로 후퇴시킨 정도의 효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서방의 예측과 기대는 빗나갔다. 우선 루블화 가치가 전쟁 발발 직후 한 달 남짓 폭락하며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서방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수출에 제한을 가하자 오히려 국제시장에서 가격이 폭등했고 여기에 러시아가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도록 하면서 이미 4월에는 루블화 가치가 전쟁 전 수준을 상회했다. 20232월 현재 1달러에 70루블대로 전쟁 전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중앙은행 금리도 안정됐다. 대외 교역도 상당한 흑자를 계속 시현해 외환보유고가 2023127일 현재 5977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많은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했다고 하나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는 8.5%만이 러시아를 떠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0월에는 러시아의 2022년 국내총생산이 3.4%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올해 1월에는 2.2% 감소로 추정했고 경제가 호전돼 2023년에는 0.3%, 2024년에는 2.1%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IMF는 또한 유럽연합이 주도한 러시아산 석유에 대한 가격 상한제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서방의 제재가 약발이 먹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러시아는 2014년 크림 합병 이래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어 제재에 대한 내성이 생겼고 2022년 제재는 예상된 것이어서 대비책을 강구해 놓았다. 그리고 서방의 제재 캠페인에 중국, 인도는 물론 대부분의 아시아, 아프리카 및 중남미 국가가 동참하지 않았다. 서방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제한하자 러시아는 중국, 인도 등 에너지 수요가 많은 국가들에 가격을 낮춰 대량으로 판매해 돌파구를 찾았다. 서방이 러시아의 제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주요 품목의 수출을 금지했으나 러시아는 상당 부분을 자국산 또는 중국산으로 대체하거나 제3국을 통해 유럽 물품을 수입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비서방 국가들과 거래를 할 때 서방의 금융 인프라를 거치지 않고 결제하는 방법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12월 아가세 데마라이스가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제재의 시대는 끝났다?(The End of the Age of Sanctions?)’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러시아는 비서방 국가들과 거래 시 상대방 국가와 통화스와프(currency swap)로 결제하거나 서방의 결제 시스템인 SWIFT를 대체하기 위해 중국이 구축한 CIPS(Cross-border Interbank Payment System)을 이용함으로써 제재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그간 미국이 달러화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비우호국에 제재를 남발하자 국제 거래에서 달러화 회피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그러한 추세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한마디로 미국이 주도하는 G7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어 대러시아 제재의 약발은 더욱 떨어질 수도 있다. 서방이 러시아에 대해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가해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기를 잡겠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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