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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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 기념 의열사 ⓒ천지일보 2023.01.11

바람이 먼저 부는 곳
지난 30년 동안 매년 평균 25.6개의 태풍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 평균 3.1개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2019년에는 20개의 태풍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이 7개나 되었다. (기상청, 태풍발생현황통계, 1981-2010 및 2019) 

태풍이 불어올 때마다 뉴스에 제일 먼저 제주도가 이야기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태풍을 맞는다.

역사의 태풍도 비슷한 것 같다. 제주도는 목포에서 약 100㎞나 떨어진 섬이어서 육지 사람들은 ‘아무래도 모든 문명과 정보가 육지에 비해 뒤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육지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도 한참 후에야 제주도에 파급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주도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먼저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을사의병과 집의계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고립되어 침략과 약탈 앞에 노출되어 있는 섬이다. 1876년 개항하자 제주는 곧 일본인들의 어업침탈에 직면했다. 1879년경부터 일본인들은 가파도와 비양도를 근거지로 하여 잠수기 조업을 하면서 제주도에 상륙하여 도민을 살상하고 가축과 재물을 약탈했다. (강만생, 「한말 일본어업의 제주침탈과 도민의 대응」, 『제주도연구』3, 1986. 참조)

1889년 11월에는 ‘조선일본양국통어규칙(朝鮮日本兩國通漁規則)’이 체결되어 일본 어민이 선단을 거느리고 제주도 근해에 합법적으로 출어하게 되고 제주도민들은 이에 반발했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은 해변에 막을 치고 풍기를 문란시키며, 마을에 함부로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항의하면 살상하기도 했다. (「제주도 어업에 관한 건」, 『일본외교문서』 24;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49에서 재인용.)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의 국권침탈이 더욱 노골화되자 1905년 3월 제주유생 이응호(李膺鎬)·김좌겸·김병로·서병수·김병구·고석구·김석익·김기수·강철호·김이중·강석종·임성숙 등 12지사는 일본인들의 어업침탈을 배격하고자 문연서숙(文淵書塾)에 모여 비밀조직 집의계(集義契)를 조직했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68.)

제주 12지사들의 집의계 조직은 육지에서 몇 달 후 시작된 을사의병의 선구적 움직임이었다. 그 첫 움직임은 집의계 조직 6개월 후인 그해 9월 원주 동쪽 주천(酒泉)에서 원용석(元容錫, 일명 容八)·박정수(朴貞洙) 등이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고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의병진은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 일진회(一進會)의 급습을 받아 해체되었다.

그 후 단양에서 정운경(鄭雲慶)이 단양·제천·영춘 등지의 의병 300∼400명을 규합하였으나 역시 원주진위대의 습격으로 정운경·박정수 등 주모자가 붙잡혔으며 의병도 해산당하였다. 이후 1906년 3월 충남 서해안 일원에서 일어난 민종식(閔宗植)·안병찬(安炳瓚) 등의 홍주의병이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31일 성이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처럼 을사~병오년으로 이어져간 의병진의 결성과 투쟁에서 제주의 집의대 조직은 그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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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천지일보 2023.01.11

통감부 시기의 지방 재편 및 장악과 제주도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탈취하고 보호국으로 만든 뒤 통감부를 설치했다. 그 후 곧 전면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했다. 350여개 부군을 230여개로 대폭 통·폐합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폐합되는 군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통감부는 이에 더이상 밀어붙이지 못하고 계획을 철회했다.

이 계획은 조선의 지방사회에 오랜 향촌공동체의 유대를 해체하여 일제의 일방적, 일원적 지배에 순응하게 하고자 한 계략이었다. 이 계획은 병탄 후 조선총독부가 안정을 기한 1914년에야 전국의 지방행정구역 전면적인 개편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계속하여 1917년 조선 면제(面制)의 시행과 면장의 전면적 교체를 통한 친일화, 1918년까지 동리 수준까지의 말단 행정구역의 통폐합을 관철시켜 조선의 지방사회를 장악했다. (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pp. 68-78.)

그런데 제주의 경우는 그보다 7년 앞서 1907년 통감부가 제주도에 제주, 대정, 정의의 3군을 설치하고, 면리에 존재하고 있던 전통적인 풍헌(風憲), 약정(約正), 존위(尊位), 경민장(警民長) 등을 철폐하였으며, 면장과 이장을 임명했다. (김석익,  『心齋集』, 『제주문화』(영인본), 1990;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69에서 재인용)

이와 함께 제주, 대정, 정의의 3군 무기고의 군기를 불태우고 재정, 치안, 재판권을 장악했다. 식민지화의 태풍이 제주도에 먼저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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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병 고승천 생가터 ⓒ천지일보 2023.01.11

독립전쟁과 제주의병
국권의 위기가 계속되고, 대한제국의 행정, 경찰, 사법, 군사권이 다 일제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망국의 위기가 현실화되자 한편에서는 국내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며, 다른 한 편에서는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1909년의 제주의병은 주도자 고승천(高承天)이 1908년 7월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로부터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고승천은 김석명(金錫命), 노상옥(盧尙玉) 등과 더불어 제주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재정확보와 동지 규합에 나섰으며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 노상옥, 조병생,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김만석, 한영근 등 10명이 창의자로 모였다. 이들은 의병장으로 고천석과 이중심(李中心)을 추대하고, 고승천·이중심·김석명이 격문을 작성하여 2월 25일 제주를 일주하며 돌렸다.

그 내용을 보면, 주민에 대해 각 마을의 이강(里綱)은 “호적에 의하여 주민을 일일이 인솔하여 집결할 것, 이에 거역하는 백성은 이름을 적어 보고할 것이며 통적(統籍) 1부를 지참할 것”이라 하여 조직적으로 이민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2월 25일 공북(拱北)으로부터 시작하여 삼양, 신촌, 조천을 거쳐 대독(大獨)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통문을 전달할 것을 명시했다.

거사 날짜와 장소는 1909년 3월 3일 제주 읍내 관덕정으로 정하고, 관덕정에서 각 동리별로 인원을 점검할 것이며, 참가하지 않은 이장은 목을 벨 것이라 경고하고 선박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며 선박 보유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다. (「재경비발(濟警秘發)」, 36-2, 1909. 3. 1.) 

격문을 받은 각 동리는 이장을 중심으로 출병을 준비했다. 창의 지도부는 1만 명의 의병대를 모집하여 일본인을 처단하고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착착 진행되던 중 3월 1일 고승천과 김만석이 체포되고, 그날 이른 아침 광청리에 집결한 의병대와 대정 주재소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으며 출병을 준비하던 신좌면 대흘리와 구우면 두모리 등에서는 출병 준비가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3월 4일 고승천 김만석이 처형되었다. 다음의 자료는 당시의 각 동리 호응상황을 보여주는 한 예다. 

제주군 구우면(舊右面) 모두리(毛頭里: 두모리의 착오) 이장 김재영(金栽瀅)은 당시 격문에 응하여 즉시 촌민 227명을 소집 수명씩의 단체를 조직 각 통수(統首)를 두고 폭동에 내응(內應)의 준비를 하였다. (「濟州島의 近況」,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1909. 3))    

비록 이상의 제주의병은 사전에 발각되어 주도자가 처형당하고 막을 내리긴 했지만, 무기제작, 군사훈련 등 제대로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한 것으로 육지와 만주의 독립운동기지건설과 독립전쟁 준비에 앞선 선구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 돌, 바람, 여자의 섬 제주도의 독립운동사 (2)-바람(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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