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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의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결국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製)로까지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즉위한 이후 몇 해는 부왕(父王) 태종(太宗)의 지휘에 따랐다.

세종은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열심히 학문에 종사하였으므로 그때 사용하던 한자(漢字)의 음운(音韻)을 정확히 잘 알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편 세종은 법전 정리(法典整理)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걱정한 점은 정리한 법을 백성들에게 알려서 위법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줄어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법전 정리할 때 우리말이 섞여서 법전이 깨끗지 못하다고 한 신하에게 세종은 우리말이 섞여 있으면 세상 사람에게 법을 알리는 데 편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법전을 정리하였을 때 나라 안에 이를 널리 알리는 데 심혈을 쏟았던 것이다.

세종은 나라의 말을 정확히 표현하는 글자가 있어야 만이 비로소 의사소통(意思疏通)이 수월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끝에 새로운 문자인 정음을 창제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런 결심을 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제 나라의 글을 갖는 것이 당연하오. 나는 이제부터 우리나라의 문자를 만들 생각이오. 경들은 과인의 뜻을 받아들여 백성이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쓸 수 있는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 주시오.”

그런데 이러한 세종의 선언에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들은 놀랐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조선은 모든 문물을 중국에서 도입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한자를 우리글처럼 쓰는 것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뜻을 함께하며 세종의 분부를 받들어 온 집현전 학사들은 세종의 명을 받들기로 하였으며,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촤항(崔恒), 이개(李塏), 이선로(李善老) 등이 본격적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집현전 학사들의 연구에 힘입어 세종 역시 틈틈이 집현전에 나와 직접 연구에 참여하였는데 세종은 어느 날 학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의 한자는 글자의 모양 자체가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이므로 배워 익히기에 어려움이 많소. 그러니 우리의 나랏글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表音文字)로 만드는 것이 좋겠소.”

세종의 이와 같은 생각에 학사들은 내심 놀랐으며 앞으로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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