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이 재위(在位)하는 동안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創製)된 과정을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세종이 한글을 만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 우리말은 있었으나 고유의 우리 글자는 없었다.

구체적으로 신라 시대에 이두(吏讀)가 사용되었는데 이두는 설총(薛聰)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문(漢文)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관리들에 의해 법률 및 행정문장 기록에 사용되었다. 

한편 일찍이 한자(漢字)를 도입하여 쓰기 시작한 삼국 시대부터 한자의 처리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한자만으로 즉 한문 표현의 글로는 옛 조선 사람들의 의사의 표시를 그대로 적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이두의 표현법(表現法)을 창안(創案)하여 우리 고유의 사람 이름을 비롯하여 나라 이름, 땅 이름, 관직 이름을 우리의 소리와 뜻대로 기록도 해보았고 여기에서 우리 옛 사람들의 서정의 노래까지 한자를 빌어 적었다.

세종 대에 있어서도 한문으로 써야 할 기록은 한자만으로 적었으나, 우리말로 된 것을 적는 데에서는 역시 이두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글자의 소리를 적는 데에도 기준은 한자의 음에 두지 않을 수 없어서 출발부터 힘든 일이 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한자 이외의 글자가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 그들 나름대로의 글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중국(中國)은 시대에 따라 한자음(漢字音)이 발달하고 영토가 넓기 때문에 방언(方言)도 상당히 많아 자연히 운서(韻書)가 자주 개편되는데 몽고족이 건국한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중국 학자들이 운서의 편찬을 단행하여 초기만 하더라도 많은 운서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악소봉(樂韶鳳)과 송렴(宋濂)이 공저(共著)한 ‘홍무정운(洪武正韻)’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운서는 고려 말(高麗末)에 도입(導入)되어 학자(學者)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조선(朝鮮)이 건국된 이후 호학(好學)의 군주(君主)였던 세종이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여기서 운서란 음성(音聲)에 관한 책인데 같은 한자인데도 중국 발음과 우리나라 발음이 다르고 옛날의 발음과 현재의 발음이 다르니 자연히 연구(硏究)의 대상(對象)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키워드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