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에서 마주한 光復의 염원
백두산 천지에서 마주한 光復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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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청소년 중국 만주지역 항일 유적지 답사’ 동행 취재 <1>

 

▲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표시하는 5호경계비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는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암울한 시대였다.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을 쓸 수 없게 함은 물론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역사와 문화마저 무참하게 짓밟았다. 이때 우리 선열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국만리 타국에서 죽음을 무릅쓴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에서 그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혈의 공로를 마음에 품은 이들이 있다. 민족종교 천도교 청소년들이 중국 만주지역 항일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4박 5일간 동행 취재한 항일유적지 답사 이야기를 2회에 걸쳐 특집으로 준비했다.

[천지일보=이길상 객원기자] 천도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지난달 22~26일까지 4박 5일간 ‘2013 천도교 청소년 중국 만주지역 항일 유적지 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심양-화전-백두산-용정-연길-도문’으로 이어지는 약 2000㎞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2011년과 2012년에 이어 세 번째로 진행한 이번 답사에는 대학생 11명, 고등학생 11명, 집행부와 지도강사 등 총 28명이 참가했다. 참가학생 대부분은 국외여행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출정식에 다소 긴장한 모습의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김인환 천도교중앙총부 종무원장은 출정식에서 “대륙의 역사와 그 광대한 정기와 선열들의 거룩한 역사의 생기를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 담아 줄 것을 바란다”며 답사단에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했다. 이번 답사의 총책임자인 김정호 단장(천도교중앙총부 기획위원회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천도교인이라는 마음을 잊지 말고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라”고 당부했다.

답사단 학생 대표인 전준업 군은 ▲자랑스러운 천도교 항일 유적 답사단으로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할 것 ▲인내천 정신으로 주변의 모범이 될 것 ▲민족의 얼과 정신을 찾아 자랑스러운 후배가 될 것을 대표로 선서했다. 출정식을 마친 답사단은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40여 분만에 심양공항에 도착했다. 현지시각은 오후 3시 40분이었다. 답사단은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화전(樺甸)으로 향했다. 4시간이면 숙소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밤 10시 30분경 숙소에 도착했다. 심양공항을 출발한 지 6시간 30분 만이다. 답사 첫날부터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답사단은 내일 일정을 위해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잠에 들었다.

▲ 답사단원들이 화전시 인민광장에서 화정의숙 옛터로 추정되는 장소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화성의숙… 천도교인 최동오 선생 운영

이튿날 답사단은 아침을 먹은 후 답사 공식일정 첫 방문지인 ‘화성의숙 옛터’를 찾았다. 화성의숙은 천도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중국 지린성(길림성)에 있었던 2년제 정치·군사 학교로 독립군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천도교인이자 임시정부의 법무부장을 지냈던 최동오 선생이 운영했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는 정의부(正義府)가 주도해 만들었는데 1926년 만주 화전현 소재 화전에 설립됐다. 숙장(교장)은 최동오 선생이었고 숙감(교감)은 천도교인 강제하 지사가 맡았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26년 4월 아버지 김형직의 친구들 주선으로 화성의숙에 입학해 그 해 9월 중퇴하고 길림의 육문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화성의숙 옛터를 방문했지만,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화성의숙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순국선열들에게 묵념하며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추모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화성의숙 옛터 옆으로는 ‘휘발하(輝發河’라는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강물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의지를 불태우며 훈련하던 선열들의 한 많은 사연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화성의숙을 복원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먼저 화성의숙 옛터 근처인 화전시 인민광장에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일에 천도교가 깊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흔적이 없더라도 이곳을 천도교가 계속 방문했으면 한다. 천도교가 화성의숙을 잊어버리는 순간 대한민국도 그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제자하. ⓒ천지일보(뉴스천지)

◆백두산 천지, 제자하, 금강대협곡

화성의숙 옛터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답사단은 백두산 천지로 향했다.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천지를 답사함으로 민족의식과 통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화전에서 백두산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도로 곳곳 공사관계로 도착 예상시간보다 한 시간쯤 늦은 오후 2시에 천지 서파매표소에 도착했다. 5시간을 쉼 없이 달려야 했다. 또 매표소에서 천지 서파휴게소까지는 1시간가량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끝없는 펼쳐진 밀림 숲 속과 야생화 군락지 고산화원은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답사단은 기대 반 염려 반으로 천지로 향했다. 폭우가 쏟아져 천지를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지는 답사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1442개의 계단을 오른 후 바라본 천지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비록 햇빛에 반사된 투명하고 영롱한 천지는 아니었지만, 답사단은 천지를 본 것 그 자체만으로 감동하기에 충분했다. 3대가 공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천지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곳에서도 분단의 아픔과 안타까운 역사적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파 5호경계비를 보고 천지가 북한과 중국으로 나뉜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답사단원들은 하루빨리 남북평화통일을 이뤄 우리 땅을 밟고 천지를 오르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천지에서 내려왔다.

답사단이 천지를 내려오자마자 천지는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변화무쌍한 천지 날씨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또한 삼복더위 중인 7월 하순임에도 천지 주변과 백두산 계곡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곳이 있었다. 서파매표소로 내려오는 중간 ‘제자하(梯子河)’와 ‘금강대협곡(金剛大峽谷)’을 둘러봤다. ‘제자하’는 사다리 같은 모양의 하천이라는 뜻으로 굳어진 용암 사이로 천지 물이 흘러들면서 반으로 갈라져 그 밑으로 맑은 물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금강대협곡’은 용암이 굳어져 이루어진 바위들이 날카로운 그대로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동양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할 만한 웅장한 협곡으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백두산은 답사단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했다.

▲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에서 답사단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청산리 유적지

답사 3일째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청산리 전투 유적지이다. 청산리 전투(청산리 대첩)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군,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으로 활약한 독립군이 1920년 10월 21~26까지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의 10여 차례에 일본 제국과 벌인 전투를 일컫는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 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뤄낸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답사단은 청산리에서 승전한 독립군들의 기상과 용맹을 생각하면서 화룡시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공원을 찾았다. 도로에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이곳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기념비가 있는 곳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출입문 주변은 기둥과 벽면에 붙어있던 돌이 떨어진 채로 방치돼 있었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말들의 배설물이 공원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이었다. 공원 안의 관리소는 빈집으로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고 기념비 계단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차라리 기념비를 세우지 말고 공원을 조성하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이런 모습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메어졌다. 기념비 앞에서 답사단은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청산리 전투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올리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용정(龍井)으로 발길을 돌렸다.

답사단 지도강사인 성주현(청암대) 교수는 “기념비 뒤편 벽면에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에서 기념비 건립을 지원하고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린다’는 내용을 담은 안내판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안내판을 걸쳐놓았던 못만 보이고 안내판의 흔적은 온데간데없다”면서 “누가 그것을 훼손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국 정부는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일에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가 우리 민족의 만주지역 항일유적지를 돌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 내에 있는 항일유적지를 누가 돌봐야 하겠는가? 그 답은 자명하지 않는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공원을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공원 입구의 모습.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아 출입문 기둥에 붙였던 돌들이 떨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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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미 2013-08-14 21:59:24
오늘의 우리나라가 존재하기 까지 많은 분들의 희생의 결과임에도 희생하신 그 분들에 대해서 희미해져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위 기사와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그분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을 잊지않도록 기리는 것은 항일유적지를 잘 돌보는 일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