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우물·담장·제방시설 등 갖춰

▲ 경주 외곽 도시유적 통일신라 석축 제방 D-2구역 (사진제공: 문화재청)

그동안 시내중심지 ‘방제’만 확인
신라시대 왕도 발달사 추정 가능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최근 경주 방내리와 모량리 일원에서 통일신라시대 도시 유적이 확인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마을 단위가 아닌 도로ㆍ우물ㆍ담장ㆍ적심(積心)건물지ㆍ제방시설 등을 갖춘 도시로 나타났다.

이 유적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ㆍ모량리 일원의 경주 동해남부선 연결선 건설공사 구간 내에서 발견됐다. 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 박승규)이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의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도로는 그 폭이 5~8m로 총 10여 곳에서 확인됐으며, 모두 남-북, 동-서 축으로 이뤄져 있다. 이 도로에 의해 구획된 하나의 방(坊)은 120m×120m의 정방형 규모로, 방 내에는 담장과 우물, 적심건물지로 구성된 가옥이 조성됐음이 확인됐다. 또 하천(大川)과 인접한 북쪽경계 지점에서는 길이 30m(동서로 계속 연결됨), 폭 5m의 석축제방이 발견돼 도시의 경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로는 다수의 수막새(연화문막새, 사자문막새), 암막새(비천문막새)를 비롯해 고배(高杯), 인화문(印花文)토기, 청동접시, 수레굴대, 탑상전(塔像塼), 치미(鴟尾, 용마루 장식기와), 청동거울 등이 출토됐다.

특히 이 유물들 중 우물 주변에서 진단구(鎭壇具,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기 위해서 지하에 묻는 매장품)로 이용됐던 청동접시의 바닥에는 ‘王’자 명문이 발견됐다.

▲ 경주 외곽 도시유적 D-2구역 우물 8호 남편 진단구 청동접시와 명문 위치(왼쪽 빨간원), 배면 명문 확대한 모습(오른쪽) (사진제공: 문화재청)

도로에서 출토된 유물 등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도시 유적의 중심 시기는 8세기경으로 판단된다. 도로와 건물지의 중복이 많고, 건물 조성 시 이용된 축성토에서 5세기의 유물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미뤄볼 때 5세기경부터 마을이 조성돼 6세기, 7세기를 거쳐 8세기경에 경주왕경과 같은 도심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에 따르면 발굴지역 일대는 신라 6부의 하나인 모량부(牟梁部)의 옛 지역으로 추정됐다. 유적지는 신라 왕경으로 진입하는 서북방면의 주요 교통로였다.

조사지역과 인접한 곳에는 사적 제43호 ‘경주 금척리 고분군’이, 북쪽으로 5㎞ 지점에는 사적 제25호 ‘경주 부산성’이 위치하는 등 역사ㆍ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의 유적으로 보인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은 이번 발굴조사 결과가 ‘삼국유사-진한조’에 기록된 “신라의 전성기엔 경중(京中)에 17만 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김입택(金入宅)이 있었다”의 ‘1360방’과 ‘360방(현재의 통설)’의 차이를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에 관한 재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또 연구원은 “이번 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경주 시내 왕경 지역 바깥인 방내리ㆍ모량리 일원에서 도로에 의해 방형으로 구획된 도시를 확인한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번 유적 발굴을 통해 경주 시내 외곽지역에서도 방제(坊制, 규격에 맞춰 조성된 동네) 존재를 확인했으며, 기존의 경주 시내 중심지를 포함해 신라 왕도의 발달사를 추정할 수 있게 됐다.

▲ 경주 외곽 도시유적 조사대상지역 내 도로 유구 상세 위치 (사진제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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