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내 어릴 때 태국은 스포츠에서 만만치 않은 아시아의 대국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만 해도 국민소득이 수백 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대한민국에 비해 태국은 안정된 정치와 풍부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잘 사는 나라였다. 국력은 스포츠에서 잘 드러났다.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던 대한민국은 부족한 외환사정으로 인해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안게임을 반납한 대한민국은 10개국과 함께 개최비용을 분납해야 했는데 대체 개최지가 바로 태국 방콕이었다.

지금 50대 이상의 중년들에게 태국은 대한민국의 스포츠 라이벌이기도 했다. 1970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등에서 복싱의 강호로 홈그라운드 이점을 앞세운 태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축구에서 태국은 대한민국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민족의식이 강한데다 심판의 텃세판정까지 앞세운 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있는 축구대회 중 하나였던 킹스컵대회에서 대한민국을 가장 괴롭히는 다크호스였다. 결승 또는 준결승 등에서 만난 태국과는 대한민국이 전력적으로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 막히는 각축전을 펼쳤다. 시차 때문에 밤늦게 잡음이 끄는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대한민국 축구팀의 승리를 가슴 졸여 기원하던 것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과 유난히 질긴 인연을 갖고 있던 태국은 골프에서만큼은 결정적인 순간에 맥을 추지 못한다. 그 첫 시작은 박세리와 태국계 미국선수 슈슈리퐁과의 1998년 US오픈 연장전 대접전이었다. IMF의 경제위기가 정점을 달리던 그해 US오픈에서 박세리는 연장 18홀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다가 대회 53년 사상 처음 벌어진 서든데스 게임 두 번째 홀서 5.5m의 과감한 버디퍼팅을 성공시켜 92홀의 대장정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박세리는 연장 18번홀서 티샷한 볼이 왼쪽으로 흐르며 연못 턱에 걸리는 위기를 맞았다. 박세리는 그 유명한 ‘맨발의 투혼’을 발휘해 기가 막힌 어프로치샷을 구사, 파세이브해 기사회생했으며 결과적으로 우승의 발판을 만들었다.

24일 박인비의 혼다 LPGA 타일랜드 대회 우승도 태국 선수를 상대로 한 기적같은 승리였다. 태국의 신예 아리야 주타누간에 2타 뒤지며 먼저 경기를 끝낸 박인비는 라커에서 짐을 싸려고 하던 중 “기다려보라”며 뜻하지 않은 얘기를 경기위원으로부터 들었다. 18번홀서 주타누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12번홀서 홀인원까지 잡고 기세를 올리던 주타누간은 18번홀 두 번째 샷이 벙커 턱에 박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고, 1벌타를 받고 경기에 나섰지만 연속 실수를 범하며 트리플보기로 무너지고 말았다.

주타누간은 어린 나이에 큰 경기경험이 별로 많지 않아 위기를 맞아 멘탈이 크게 흔들렸던 것이 패인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주타누간은 세계여자골프에서 강국으로 자리 잡은 한국여자골프에 ‘이겨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까지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상급 프로로서 아주 이례적인 마지막 홀 트리플보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이날 박인비의 마지막 5개홀 경기를 케이블 TV 생중계를 통해 보면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우승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에 지독히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태국의 골프는 변화된 양국 스포츠 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수십 년 전 태국보다 형편없던 대한민국은 이제 경제력에서 세계 10위권을 넘볼 정도로 크게 성장했고 스포츠도 10대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에 반해 태국 스포츠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답보상태를 보인 경제력의 영향인 듯, 아시아 강국에서 밀려난 지 오래됐다.

대한민국과 태국의 스포츠 인연을 살펴보면서 한 국가의 경제력이 얼마나 스포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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