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아침이 열리기 전 일찍 일어나 인근의 나지막한 산에 오르면 새벽의 상쾌한 정기(精氣)를 한껏 들이마시게 된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힘들이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숲 우거진 동산이므로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가깝다. 햇빛이 비치기 전이어서 환하던 때 신록을 뽐내던 산과 숲은 미명의 하늘에 비추어 어렴풋이 윤곽만 간신히 보일 뿐이다.

그 미명의 숲 속 길은 꽤 어둡다. 그 길을 걸을 때는 눈으로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고마운 손길이 내준 발에 익은 길을 따라 발로 더듬어 걷는다. 길이 없거나 가던 길이 아니면 갈 수가 없다. 한동안 그렇게 걷다 보면 밤을 지배하던 어둠이 걷히며 날이 부옇게 샌다. 날이 새면서 드디어 뜨고도 보이지 않던 눈이 열리고 마음도 환하게 밝아진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그 빛을 갈망한다. 그 빛에 대한 갈망이 희망이다.

빛이 나타나면 꽃과 나무, 흙과 돌멩이, 바위, 풀숲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보고 또 보아 눈에 익숙한 것들이지만 이슬을 머금고 막 어둠에서 벗어난 그것들은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새롭다. 그래서 오늘 맞이하는 아침은 어제 맞은 아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 아침이다. 숲 속에서 새 아침을 맞는 기분 역시 어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날아갈 듯한 새 경험의 새 기분이다.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지만 어둠은 무섭다.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로 움직이는 사람은 서로에게 두려움을 준다. 빛이 그 거동과 표정을 드러내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서로를 반기게 된다.  

태양이 둘이라면 그 두려움을 주는 어둠은 없을 것이지만 창조주는 하나의 태양만을 만들어 빛과 어둠이 순환해가며 지구의 반반씩을 지배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창조주의 실수라고 말해야 할 근거를 인간의 능력으로는 찾아낼 수가 없다. 인간은 영장(靈長)이지만 감히 그렇게 말할 주제는 못된다. 그저 만들어진 음(陰)과 양(陽) 조화의 질서를 따라 뭇 생명들과 함께 적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대신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만약 해가 둘이어서 지구의 열기를 식혀주는 밤이 없다면 지구는 쇳물이 펄펄 끓는 용광로와 같이 되고 말아 사람을 비롯한 어느 생명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태양이 있어 존재하는 어둠은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니다. 빛만이 누리를 지배해 좋고 유용한 것만도 아니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이 빛만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어둠과 빛을 다 좋아해 낮과 밤 어느 때라도 활동할 수 있는 생명들도 있고 지하의 미생물이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해의 동식물과 귀뚜라미 반딧불을 포함해 지구의 많은 생명들은 어둠을 선호한다. 더 말할 것 없이 사람은 빛을 좋아하는 생명군에 속한다. 그런 사람의 감정으로 어둠은 두렵고 싫을 수 있지만 사람을 짓누르는 그 어둠이 없으면 새 아침의 감동도 없다. 어둠이 있고 그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있기에 새벽 산책을 나서는 사람들은 새 아침의 감동을 새롭게 또 새롭게 되풀이해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빛이 있는 동안의 낮을 바쁘게 보내어 피로에 지친 사람에게 몸을 쉴 수 있게 해주는 밤은 푸근하고 큰 위로가 된다.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밤에 활동하는 생명은 밝은 낮에 빛을 피해 피곤한 몸을 쉰다. 그렇기에 어둠과 빛, 밤과 낮, 음과 양은 분절돼 대립하는 모순적인 현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하나만 있고 다른 하나가 없으면 둘 다 아무 쓸모없는 ‘2위 일체의 오묘한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명의 수준을 높여 가는 사람은 어둠을 몰아내려 애쓰지만 어둠은 빛만큼이나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성적인 도량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침이 열리기 직전 숲 속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정적이 깨지며 요란하다. 저들은 저녁 일찍 잠에 듦으로 일찍 깬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분주하게 퍼덕이던 날개를 접는다. 나뭇가지에 앉아 역시 한바탕 지지고 볶고 떠들다가 어느 땐가 일시에 뚝 그치고 잠이 든다. 잠든 뒤에는 야행성 날짐승이나 나무를 타고 은밀히 기어 올라오는 천적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절대로 떠들지 않으며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희생자는 나오기 마련이다. 여기 저기 심상찮게 흩어진 깃털들이나 핏자국이 그것을 말해주며 생명을 빼앗기고 남긴 그 흔적들은 연민(憐憫)을 자아낸다. 저들은 잠 잘 때 보초를 세우지 않는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저들이 보초를 세워 천적들의 접근을 경계한다면 아마 그 천적들은 몹시 배가 고파 힘들어할 것이 틀림없다.

숲 속의 삶과 죽음의 질서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며 먹고 먹히며 냉정하게 돌아가는 질서에 자비와 같은 것은 없다. 먹히지 않으려면 날고 기고 뛰고 숨고 하는 나름대로의 특기를 발휘해야 하며 사실 그 같은 보신책 때문에 쉽게 먹히지도 않는다. 먹이를 쫓는 입장에 있더라도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심심풀이로 아무 생명이나 죽이는 사냥을 하거나 썩어나도록 쌓아두는 터무니없는 탐욕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는 사람의 손길이 깊숙이 닿지 않는 한 항상 균형을 유지한다. 야생의 약육강식이 잔인해보이지만 인간의 학살 행위와 도살, 파괴의 잔인함에 비한다면 그것은 아주 하찮은 것이며 최소한으로 절제된 생존경쟁에 불과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무슨 의미를 주고받는 저들끼리의 대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듣는 사람의 마음이 즐거울 때면 언제나 한량없이 즐겁고 밝고 명랑하게 들린다. 가끔은 시끄럽다고 제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 같은 사람은 언짢은 일이 가슴을 메워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람일 것이지만 사람이 자기 기분을 가지고 숲 속의 일을 아무렇게나 간섭할 일은 아니다. 청정한 숲은 그 속에 사는 생명들 고유의 영역이며 그들의 특권적인 세계다. 그렇지만 어둠과 빛이 일체로 함께 존재하는 의미처럼 숲은 인간 사회와 ‘하나’로 조화되어 공존해야 한다. ‘복사꽃 시냇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는(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의 이상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숲을 함부로 파괴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과 그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 자명하다.

새벽 산책을 마치고 숲을 나서면 잠시는 공해에 숨이 막히고 각종 소음과 불협화음들에 귀는 아프기 시작하지만 사람에게는 그곳이 바로 소중한 삶의 현장이다. 부대끼고 시달리는 그곳이 있어 청정한 숲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끼리도 남이 있어 내가 소중하고 내가 있어 남이 소중한 것이므로 우리 모두가 우려하듯이 극단적으로 편을 가르고 나누어 싸울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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