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관 외관 (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5.23
영빈관 외관 (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5.23

청와대 영빈관 국민에게 공개
선조들도 예절 담아 사신 맞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지난 10일 청와대가 국민에게 개방됐다. 제20대 대통령 취임식과 함께 74년 만에 청와대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개방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500만명이 관람 예약을 신청했고, 37만 7888명(5월 22일 기준)의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23일부터 청와대 영빈관과 춘추관 내부를 추가 공개키로 했다. 이 가운데 영빈관은 국빈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선조들은 외국 사신 방문 시 예를 표하며 소통하려 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이 베푼 최고의 연회장소는 어디였을까.

영빈관 내부(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5.23
영빈관 내부(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5.23

◆조선 건국 초, 외국 사신 숙소 마련

조선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시대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한 곳은 태평관(太平館)·모화관(慕華館)·동평관(東平館)·북평관(北平館) 등이 있었다. 태평관은 명나라 사신이 머물던 곳이다. 모화관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돈의문 서북쪽에 지었다. 동평관은 일본 사신을, 북평관은 야인(여진)을 접대하던 곳이다.

태평관은 고려시대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태평관으로 고쳐 부른 데서 비롯됐다. 원래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을 위해 원나라 세조(世祖)가 세웠으나, 몽고가 물러간 후 중국 사신의 숙소로 바뀌었다. 조선은 궁궐과 도성을 새로 창건하면서 1393(태조 2)년 정동행성을 태평관이라고 고쳤다. 그 후 한양에 태평관을 신축하고 영접도감의 관리 아래 두어 사신 접대 장소로서의 기능을 하게 됐다.

서울서대문 독립문과 모화관 원경(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서대문 독립문과 모화관 원경(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모화관은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새 임금이 즉위해 중국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1894(고종 31)년 청일전쟁 이후 모화관은 폐지됐다가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모화관을 사무실로 쓰면서 독립관으로 이름이 바뀐다. 모화관 앞에는 영은문이 있었는데, 독립협회 주도로 성금 모금이 이뤄지면서 영은문이 헐리고 독립문이 세워진다.

동평관은 조선시대에 일본 사신이 와서 머물던 객관(客館)이다. 1407(태종7)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인사동 부근에 위치했다. 동평관은 관사와 창고를 설치해 그릇과 미곡을 저장하고 일본의 사신과 객인을 접대했다. 이곳은 해가 뜨면 문을 열고, 지면 문을 닫게 해 출입을 엄하게 했다. 공청무역(公廳貿易) 외에는 관문 밖에서의 무역을 금했으며 위반자는 엄격하게 다스렸다.

북평관은 조선시대 여진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태종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 일대에 있었다. 서울에 들어오는 여진인의 수는 풍년과 흉년으로 나눠 각 120명, 90명 등으로 제한했다. 외교사절이 조선에 도착하면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했기에 여진인의 상경 왕복로인 함경도와 강원도가 흉년일 때에는 더욱 제한했다. 여진인이 서울에 도착하면 소유한 병기를 모두 거두었다가, 돌아갈 때 돌려줬다고 한다.

경복궁 경회루 ⓒ천지일보DB
경복궁 경회루 ⓒ천지일보DB

◆연회 베풀던 경회루도 인기

경복궁 내에 있는 경회루(慶會樓)도 외국인 사신 접대를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평소에는 조선시대 왕이 뱃놀이하는 왕실의 정원으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과 대규모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그러다 외국 사신 방문 시 사신 접대 공간으로 사용됐다.

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 경회루는 없었고 당시에는 작은 누각 정도만 세워뒀다. 그 후 1412년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았다가 1867년 고종 때 재건됐다.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경회루는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삼아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소다. 오늘날 경복궁을 방문하는 방문객에게도 최고 인기 장소다.

나주 금성관 (출처: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5.23
나주 금성관 (출처:문화재청) ⓒ천지일보 2022.5.23

지방에서도 사신 접대는 중요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장소로는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이 있었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37호로 지정돼 있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하나인 객사 건물이다. 객사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임금에 대한 예(망궐례)를 올리거나, 지방에 오는 사신이나 관원을 접대하는 공간이다. 금성관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종 문헌 기록으로 볼 때, 조선 초기부터 지금의 자리에 존재한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이전에 갖춰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1775년과 1885년 중수됐고, 일제강점기에는 군 청사로 사용되다가 1976년 보수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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