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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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은 옛 월(越)의 수도였다. 월왕 구천(句踐)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지독한 인간의 집념이 보여준 복수극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봄날의 소흥에는 그런 무서운 이야기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와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가 더 어울린다. 항주나 소주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소흥은 중국 남방의 역사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자취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 자취는 춘추시대에서 근대까지 2500년 이상 이어졌다. 소흥의 역사를 열면, 제법 두툼한 한 권의 인문학 서적 속에서 짙은 향기가 풍겨 나온다. 도시 곳곳은 파노라마처럼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진 풍속화가 펼쳐진다. 이곳 사람들은 나아가려는 것보다 멈추거나 시계를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검은 기와와 흰 담장으로 둘러싸인 옛길에는 명사 사안(謝安)이 한가하게 거닐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항(巷)이라고 부르는 골목 어딘가에 서위(徐渭), 육유(陸游), 하지장(賀知章)을 만날 수 있고, 수시로 지나가는 검은 가림막으로 장식한 오봉선(烏篷船)이 멈추면, 노신(魯迅)이 그려낸 공을기(孔乙己)가 나타날 것 같다. 모택동(毛澤東)과 음양으로 결합된 주은래(周恩來)의 세련된 몸짓과 채원배(蔡元培)의 두터운 지성도 보인다. 소흥을 담장이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오랜 역사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시가지는 웅장한 회계산(會稽山)을 등지고 넓은 들판과 풍부한 물과 어울린다. 걸음마다 만나는 역사적 전고(典故)는 아는 정도에 따라 감동의 울림을 전한다. 소흥의 첫인상은 시내를 관통하는 수로에서 비롯된다. 자동차를 배제하면, 배를 타고 건너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첫인상은 점차 사라졌다. 좌우로 교차되는 수로는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다리 덕분에 건넌다는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난날 월의 수도는 지금의 소흥보다 방대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거리는 지금보다 넓고 길었을 것이다. 곳곳에 버드나무와 꽃이 있었을 것이다. 구부러진 입구마다 각이 진 모서리로 연결된 복잡한 거리는 이 도시가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한다. 풍성한 속내가 이 도시의 깊은 주름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객을 반긴다. 문득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어디도 내가 지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먼 과거로 변한다. 소흥이 주는 공간적 매력이다. 그러나 이 속 깊은 도시도 현대화라는 압력과의 싸움에서 점차 밀리고 있다. 굽은 길은 곧아지고, 좁은 골목은 널찍해졌다. 고도가 깨어나 활발해진 것은 당연하지만, 구부러진 길과 사통팔달하던 수로가 주던 그윽한 문화적 흥취는 점차 플라스틱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사람들은 깨달았다. 사실상 고도는 크지 않았다. 시간과 역사와 상상이 이 도시를 키워왔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생각의 깊이와 확장에 따라 이 도시의 외연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오랜 과거와 현대화가 소흥에서는 아직도 세차게 충돌한다. 이 충돌은 길게 이어질수록 흥미가 있다. 누가 간단하고 확실하게 소흥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소흥을 모두 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당연히 나는 아니다. 소흥인 자신도 감히 소흥을 모두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신비함 자체가 소흥의 매력이다. 소흥의 유명한 전통음식은 곰팡이를 활용해 지독한 냄새가 나도록 발효한 갓김치와 압축시켜서 얇게 만든 두부다. 옛 월나라에서부터 비롯됐다고 하는 이러한 음식은 소흥인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이다. 그러나 낯선 여행객에게는 고통이다. 소흥인들과 친해지려면 이 냄새 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으면서 엄청나게 맛있다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김치에 매료된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 곰팡이에서 소흥인들은 자신들의 안목과 기쁨에 만족한다. 그것은 그들의 지혜이자, 우환의식의 결과였다. 유명한 황주(黃酒)는 곰팡이의 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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