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인천언론인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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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무의적으로 서구 문화를 동경했거나, 일본의 만화와 음악을 수준 높은 것으로 알았다. 요즘 방탄소년단(BTS)의 세계관이 시사적 또는 학술적으로 논의되고 봉준호 감독, 윤여정 여배우가 아카데미 무대를 휩쓸고 있어 놀랍기 그지없다. 2020년 한 해 동안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100편 가운데 한국의 K드라마가 10편이나 된다고 한다.

청년들이 외치는 ‘헬 조선’,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 노인빈곤율 및 자살률이 최상위권이라는 현실이 암담하긴 하지만 김구 선생이 바라마지 않던 문화 강국의 반열에 올라선 건 맞다.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려는 문화기획의 현장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가봤던 인천 서구의 ‘민중의 집’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내 9개 서원 중 하나인 충남 논산시 ‘돈암서원’에서 감동을 받았다.

#1 과거-현재 콜라보레이션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립학교이고 서원은 사립학교다. 서원은 전국에 1000개 정도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 뜨거운 교육열의 상징이었으나, 대원군 때 모두 파괴되고 30개 남짓 남겨둔 것으로 전해진다. 퇴계 선생의 친필 현판이 있는 소수서원을 비롯해 남계, 옥산, 도산, 필암, 도동, 병산, 무성, 돈암 등 9개 서원이 2019년 세계유산으로 선정됐다.

이들 서원 중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사당인 ‘유경사’, 유생들에게 강학을 했던 강당인 ‘응도당’, 고요하게 사색하며 수행하던 ‘정회당’, 대유학자 김장생 선생의 문집을 펴내는 등 목판 인쇄소 역할을 했던 ‘장판각’과 같은 옛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세계유산 9개 서원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한 돈암서원을 관리하는 광산김씨 문중이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응도당, 정회당 등 옛 한옥과 마당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기획자가 1년간 공을 들인 끝에 강용현 낸시랭 박방영 신태수 등 현대 미술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다시 봄’ 기획전이 2개월 동안 진행될 수 있게 됐다. 마당 비석 앞에 파란색 볼링공 수십 개를 소재로 한 이색적인 설치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신을 벗고 올라선 한옥 전시실에 마징가Z 등 만화 캐릭터를 변형시킨 팝 아티스트 작품들이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서원에 상주하는 학예연구원이 엄청나게 늘어난 관람객 물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서원이 썰렁했는데, 전시회가 열리고 나서 얼마 안 돼 주말이면 600명 넘게 관람객이 찾아오고 있다.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연신 올려주고 있어 젊은 관객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간 심심했었던 학예연구원이 관람객들에게 신나고 현란한 말투로 서원을 소개하느라 분주해졌다.

#2 주민 사랑방 ‘민중의 집’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 유럽으로 망명했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홍세화 씨의 영향으로 2010년부터 국내에서 ‘민중의 집’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기금으로 시작된 스웨덴의 민중회관처럼 서울 마포, 구로와 광주, 전북 장수 등지에 민중의 집, 농촌집이 생겼다. 2013년 인천 서구 원도심 목재단지 주변의 주택가에서도 ‘서구 민중의 집’이 노조원과 주민들이 낸 1만~3만원의 회비로 마련됐다. 누구나 편히 만나 따듯한 관계 맺기가 가능한 사랑방이다.

교사를 하다 퇴직한 주민이나 예술가들의 재능기부로 운영되는 돌봄교실과 발달장애인에게 기쁨을 주는 ‘꿈꾸는 미술교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물화 그리기와 생활용품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는 ‘누구나 예술 척척’, 직장인을 위한 퇴근 후 ‘미술 인문학 교실’, DIY 가구 만들기인 문화충전소 ‘목공데이’ 등 동네 사람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강좌가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임차료 기부운동을 통해 도심 텃밭을 가꾸면서 김장나눔 봉사활동도 매년 빠짐없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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