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나는 영문학과 교수다. 이즈음 나는 심신이 몹시 지쳐 있다. ‘대학 법인화’ 문제로 학교가 찬성과 반대파로 나뉘어 시끄럽기 때문이다. 나는 어서 방학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종강을 하는 날, 부동산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P한테서 전화가 왔다. 투자 건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는데 이참에 함께 관광이나 즐기자고. 경비는 모두 자기가 부담하겠단다. P는 내 죽마고우다.

“다만 며칠 동안은 너 혼자서 놀아야 해. 나는 먼저 사업적인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
P의 이런 호의는 휴식이 필요했던 나에겐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웬 떡인가 싶어 나는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캄보디아의 최고급 휴양지였다. 해발 고도가 높은 데다가 호수를 끼고 있어 공기가 맑았고 기온도 놀기에 맞춤했다. 휴양지 일대에는 잘 지어진 별장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건물은 우리가 묵을 호텔이었다. 이름 하여 ‘히든 펠리스’였는데, 정말이지 밀림에 둘러싸인 호텔은 비밀의 궁전처럼 신비하면서도 고풍스런 맛을 풍겼다. 등급은 당연히 특1급이었다.

여장을 풀자 P가 말했다.

“아무 생각 말고 며칠간 ‘슬로 라이프’에 빠져봐. 늦어도 닷새 안에 볼일을 마칠 테니까, 그때 함께 앙코르 와트도 둘러보고 관광을 즐기자고.”

이튿날 아침 P는 떠났다. 캄보디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투자처를 답사하기 위해서.
“중국은 이미 노른자위가 다 드러난 상태야. 베트남에서는 생각보다 영 재미를 못 보았고.”

P의 말로 판단컨대 그는 이 나라의 부동산 투자에 꽤 기대를 거는 모양 같았다. 어쨌거나 나는 녀석이 일을 보는 동안 혼자 편안하게 이국의 자연을 즐기기로 했다. 청량한 공기, 투명한 햇살, 열대수림의 그늘, 맑은 호수 주위로 나 있는 둘렛길… 특히 이 둘렛길은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 아래로 이어져 있어, 산책로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 길을 따라 나는 유유자적 걸었다. 그리고 밤에는 갓난아이처럼 단잠을 잤다.

다음 날도 아침을 먹자마자 나는 프론트에서 영문판 신문 한 부를 얻어서 손에 쥐고는 산책에 나섰다. 신문은 걷다가 다리쉼을 할 때 훑어볼 참이었다. 산책길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호수 가에는 낚시를 드리운 주민이 이따금 보일 뿐이었다. 한 50분쯤 걸었을까, 눈앞에 벤치가 나타났다. 나는 그리로 가 앉아 천천히 신문을 펼쳤다.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이 드디어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기사가 1면을 채우고 있었다. 신문을 훑어보던 나는, 그러나 재판이 과연 정의롭게 진행될까 싶은 회의를 가졌다. 기사 행간의 뉘앙스도 그러하거니와 현 집권세력인 훈 센 총리 또한 ‘킬링필드’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말이다. 남의 나라 일이긴 하지만 200만 명이나 되는 인명을 학살한 주범들의 재판을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시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이상한 냄새를 풍겼다.

‘그래, 생선가게를 고양이한테 맡겨서는 안 되는 법이지.’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신문을 접어버렸다. 접고 고개를 드니 불과 몇 걸음 앞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강태공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줄잡아도 칠십은 넘었지 싶었다. 그 순간 노인의 눈이 나와 우연히 마주쳤다. 나는 자연스레 목례를 던졌다. 노인도 답하듯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찌로 돌렸다. 나는 그런 노인과 호수를 바라보며 한 10분쯤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 다음 날도 나는 신문을 손에 쥐고 호숫가를 돌다가 그 벤치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도 어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이 혼자만 아는 낚시 명당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먼저 신문부터 훑었다. 재판정에 나온 ‘전범’들의 얼굴이 한 면을 온통 장식하고 있었다. 폴 포트 정권 당시 2인자였던 누온 체아, 국가 주석 키우 삼판, 외무장관 이엥 사리, 내무장관 이엥 트리트 등이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모두 무죄를 주장하며 재판을 비웃는 듯한 발언까지 해대고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신문을 내려놓는데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알은체를 했다. 나도 얼른 어제처럼 목례를 보내고는 자세히 살펴보니 노인은 한쪽 손이 없었다. 왼손이 의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노인은 능숙하게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손을 잃었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노인의 한쪽밖에 없는 손에 호기심이 생겼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나는 문득 노인을 떠올리고는 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삼아 한손으로 유유히 낚시를 하던 노인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랬을까.

또 하루가 지났다. 이곳에 온 지 벌써 닷새째가 되는 날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산책길에 나섰다. 습관처럼 영문판 신문을 손에 든 채. 내 발걸음은 이제 자동적으로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오늘은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서운하고 허전했다. 꼭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나는 신문을 펼쳤다. 1면은 여전히 전범 재판에 대한 기사로 넘쳤다. 하지만 별다른 알맹이는 없었다. 그저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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