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출신 25명‧타지출신 5명

의병나룻배‧어선 공격 일제와 투쟁

[천지일보 인천=김미정 기자] 인천대학교는 지난해 10월 13일부터 강화의병 발굴에 나섰던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강화의병 30명을 발굴해 오는 7일 강화군청에서 보고회를 연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강화의병은 일제침략기 강화 출신 25명과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일본 군경과 의병투쟁을 벌였던 타지 출신 5명을 포함한 30명이다.

강화의병 발굴 보고서. ⓒ천지일보 2022.2.5
강화의병 발굴 보고서.(제공: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천지일보 2022.2.5

정부에서 의병 공적으로 포상을 시작한 1962년 이래 지금까지 강화 출신은 8명에 불과했지만 이번에 3배가 넘는 의병 유공자를 발굴했다. 또한 이번 보고서에는 포상된 강화의병의 공적까지 정리해 소책자를 만들어 강화의병의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 의미를 더했다.

인천대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사연구소를 설립해 3년 동안 6차례에 걸쳐 2828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다. 곧이어 신청 예정인 7차 422명을 포함해 총 3250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포상신청을 하게 된다.

앞서 인천대독립운동사연구소와 강화군은 지난해 11월 4일 ‘강화군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신청’에 상호 협력하기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강화도에서 의병 투쟁과 3·1독립만세의거, 반제국주의 투쟁 등에 많은 분들이 순국하거나 투옥됐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거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구한말 ‘매천야록’에 의하면 강화에 모인 경기의병은 무릇 7000명이나 됐고, 일본군과 일진회원 피살자가 셀 수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강화군 출신으로 ‘대동창의진’을 이끌었던 이능권 장군은 의병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에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로 인해 발굴된 의병장과 의병은 김용기(金龍基)‧이능권(李能權)‧지홍윤(池弘允) 의병장이 이끌었던 의진(義陣:의병부대) 소속의 의병장과 의병이 대부분이다. 강화의병은 뭍에서는 이능권 의진, 바다에서는 김용기·지홍윤 의진이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군함과 수뢰정으로 강화 앞바다에서 폭도토벌에 나섰다’는 일본 기밀보고서(『폭도에 관한 편책』. 인경비 제350호).(제공: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천지일보 2022.2.5
‘군함과 수뢰정으로 강화 앞바다에서 폭도토벌에 나섰다’는 일본 기밀보고서(『폭도에 관한 편책』. 인경비 제350호).(제공: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천지일보 2022.2.5

이능권 의병장은 강화 출신으로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들어 헤이그특사 이준(李儁) 일행을 호위해 남대문역에서 열차를 이용, 부산을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여객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결국 이준 특사가 자결하고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 당했다는 소식에 그는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를 의병의 천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김용기 의병장은 황해도 배천 출신으로 시위대 기병 부교(副校)로 근무 중, 군대가 해산되자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거의한 박정빈(朴正彬) 의진에서 창의돌격대 총대장이 되어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8년 4월부터 10월까지 강화‧교동과 인근 도서지방에서 활약했다.

지홍윤 의병장은 강화 출신으로 강화진위대에 부교(副校)로 근무했고, 제주도에서 전역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일제에 의해 1905년부터 강화진위대가 강화분견대로 축소됐다.

여기에 1907년 8월 군대까지 해산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강화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 도서지방과 황해도 평산‧배천‧연안군까지 김용기 의병장과 맹위를 떨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Ⅱ권 ‘한국광복군소사(1943)’에는 6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공적이 담겼는데, 지홍윤은 군대해산에 반발, 자결한 박승환(朴昇煥)에 이어 19번째로 소개될 만큼 훌륭한 인물로 기록됐다.

치하야함[千早艦] - 1901년 취역, 러일전쟁 때 통보함. 1,238톤, 전장 83.19m, 최대시속 21노트, 12cm포 2문, 8cm포 4문, 어뢰발사관 2기, 승조원 125명
치하야함[千早艦] - 1901년 취역, 러일전쟁 때 통보함. 1,238톤, 전장 83.19m, 최대시속 21노트, 12cm포 2문, 8cm포 4문, 어뢰발사관 2기, 승조원 125명

일제는 강화의병 진압을 위해 러일전쟁 때 통보함(通報艦)으로 활약했던 군함 치하야[千早]와 사기[鷺]‧우즈라[鶉]‧하시다카[鷂] 등 쾌속 수뢰정(水雷艇)을 동원해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을 왕래하는 의병들의 나룻배나 어선을 공격했다.

또 뭍에는 육전대(陸戰隊:우리 해병대와 유사함)까지 파견해 약 6개월 동안 의병 진압에 나섰다. 김용기·지홍윤 의진은 7척의 선단을 형성하여 강화도를 비롯한 도서지방을 오가며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한말 의병사에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의병장 의진에서 활약했지만 아직 포상되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용기 의진의 금찰장(禁察長) 고재환(高在煥)・소모장(召謀長) 김장석(金長石), 이능권 의진의 참모 김추옥(金秋玉)・여만복(呂萬卜)・유성준(兪成俊)・이호춘(李浩春), 지홍윤 의진의 고부성(高夫成)・김신명(金愼明)・장동섭(張東燮) 등이고, 강화도에서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의병투쟁을 벌인 의병장 김태의(金泰宜)・오윤영(吳允榮)・장인선(張仁善) 등이다. 발굴과정에서 문서도 발견됐다. 문서에는 강화군 하도면 주윤창(朱潤昌), 내가면 배영도(裵永道) 집에 의병이 금품을 강탈해 갔다고 인천경찰서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강화 외포항에서 바라본 양도면 건평리 해안, 의병 진압을 위해 일본 군함 '치하야함[千早艦]'과 수뢰정 정박지. (제공: 인천대 독립운동연구소) ⓒ천지일보 2022.2.5
강화 외포항에서 바라본 양도면 건평리 해안, 의병 진압을 위해 일본 군함 '치하야함[千早艦]'과 수뢰정 정박지. (제공: 인천대 독립운동연구소) ⓒ천지일보 2022.2.5

이는 주로 이능권 의진이 총기 구입을 위해 강화군 재력가들에게 금품을 요청하고 재력가는 금품을 마련해 두었다가 이를 제공한 것인데, 일본 군경에 이 사실이 발각될 경우 ‘폭도 협력자’라 해 엄청난 고초와 형벌이 따랐다. 이에 의병들이 요청한 금품을 가지고 갈 때는 재력가를 새끼줄로 묶고, 폭행을 가해 마치 강탈해 가는 형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경인지역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 화보, 강화의병 현황, 강화의병 공적 포상자 공훈록,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 강화의병에 대한 통감부기록과 한국독립운동사를 정리한 칼라 4·6배판 126쪽 분량이다.

이날 유천호 군수는 “강화의병 등 많은 분들이 순국하거나 투옥됐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사료를 발굴‧정리를 제대로 못했다”며 “강화 출신 의병뿐만 아니라 3·1독립만세의거, 국내외 광복활동을 했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발굴하고, 특히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공적도 제대로 발굴돼 하루빨리 포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강화군민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최용규 인천대학교 이사장은 “인천대는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을 이어가고 있다. 유천호 군수의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 발굴을 의뢰한 것은 매우 뜻깊은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연구소장도 “강화의병뿐만 아니라 3·1독립만세의거‧국내외 반일투쟁에 선두에 섰던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포상을 신청하고 그 공적을 하나의 책자로 묶어내면 ‘강화독립운동사’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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