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 기념관 외부. (제공: 최용신기념관) ⓒ천지일보 2021.12.16
최용신기념관 전경. 최용신기념관은 소설 ‘상록수(심훈)의 여주인공(채영신)으로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의 삶과 업적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됐다. (제공: 최용신기념관) ⓒ천지일보 2021.12.16 

샘골강습소 자리에 복원돼
“배움만이 세상을 바꾸는 힘”
교육활동 통해 애국심 심어줘
안산시, 관련 학술총서 발간
“여성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길”

[천지일보 안산=김정자 기자] “겨레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 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최용신 선생이 남긴 말씀이다.

안산에 있는 최용신기념관은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교육 활동을 통해 애국심을 심어준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1909~1935)의 삶과 업적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됐다. 최용신과 당시 샘골마을(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사람들이 함께 세운 ‘샘골강습소’ 자리에 복원됐다.

ⓒ천지일보 2021.12.16
[천지일보 안산=김정자 기자] 최용신기념관 전경. ⓒ천지일보 2021.12.16

최용신기념관은 많은 사람이 자녀들과 방문하며 ‘배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사람들의 쉼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에서 부친 최창희와 모친 김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는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했고, 부친은 1927년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최용신의 기독교 신앙, 교육가 정신, 민족 사상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그는 1928년 함경남도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협성여자신학교에 재학하면서 농촌운동에 대한 사명을 갖게 됐다.

샘골강습소 낙성식. (제공: 최용신기념관) ⓒ천지일보 2021.12.16
샘골강습소 낙성식. (제공: 최용신기념관) ⓒ천지일보 2021.12.16

◆함께 만든 배움터 샘골강습소

1929년 하기 방학을 이용해 황에스더 교수의 지도로 황해도 수원군 천곡면 용현리에서 농촌운동의 방향을 터득했고, 제2차 농촌실습지로 경상북도 포항읍 옥마동에 파견돼 성공적인 농촌활동을 마쳤다. 이후 1931년 10월 23세 나이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사리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견돼 샘골강습소 창설 인가를 받았다. 최용신은 예배당을 빌려 아이들과 함께 흙장난하면서 한글을 가르쳤다. 그렇게 샘골의 아이들, 샘골 사람들과의 만남은 시작됐다.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처음 학교를 세웠을 때는 수많은 냉대와 비판이 선생을 향했다. 선생은 굴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천곡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최용신은 가난과 무지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배롭게 보았고 식민지 상태였지만 나라의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어둠 속에 있는 아이들을 빛의 세계, 희망의 세계로 이끌었다. 샘골강습소는 한글·산술·체조·음악·성경·재봉·동화 등의 신교육을 가르쳐 나라의 미래를 위한 인재들을 키우는 곳이었다. 샘골 아이들의 발걸음은 늘 새로움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최용신은 샘골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그들도 최용신이 2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신뢰하고 존경하게 됐다. 샘골 사람들은 최용신을 ‘둘도 없는 종, 둘도 없는 여왕, 둘도 없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피와 땀을 바쳐 문맹·무지·가난, 나라 잃은 설움으로부터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힘겨운 투쟁의 삶을 살았다.

그러자 헌신적 노력으로 강습소를 찾아오는 학생 수가 점차 늘어났고, 1932년에는 새로운 샘골강습소를 짓기 위해 건축발기회를 조직했다. 1933년 1월 15일에는 마을 사람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강습소의 낙성식이 이뤄졌다.

최용신과 상록수 도서 일괄. (제공: 최용신기념관) ⓒ천지일보 2021.12.16
소설 ‘상록수(심훈)의 여주인공(채영신)으로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과 상록수 도서 일괄. (제공: 최용신기념관) ⓒ천지일보 2021.12.16

◆샘골강습소 운영에 어려움이 오다

최용신은 1934년 체계적인 농촌교육을 위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나 지병인 각기병이 악화돼 6개월 만에 샘골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일제 수탈 강화와 YWCA의 보조금 중단으로 학원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최용신은 여성잡지 ‘여론’에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라는 호소문을 기고하는 등 샘골학원에 후원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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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안산=김정자 기자] 최용신 묘소. ⓒ천지일보 2021.12.16

◆별세 후 그의 활동 더 알려져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해 두 번에 걸친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만 25년 6개월에 과로와 지병이 악화돼 결국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강습소를 계속 운영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지역민과 교회, 자원봉사 교사들에 의해 최용신의 뜻이 이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최용신의 약혼자 김학준에 의해 샘골고등농민학원이 문을 열어 농촌 청년을 길러내기도 했다.

최용신은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샘골(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 달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샘골사랑을 놓지 않았다.

최용신의 삶과 정신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상록수 정신은 최용신의 정신을 상징했으며, 또한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수많은 청년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했다. 1995년에는 최용신의 활동이 독립운동 일환으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2005년 1월에는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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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안산=김정자 기자] 최용신 선생이 남기신 말씀이 새겨진 기념비. ⓒ천지일보 2021.12.16

◆최근 문화제·추모행사로 재조명

최용신기념관은 제자인 고 홍석필 기부와 안산 시민들의 힘을 모아 2007년에 개관한 공립박물관이면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이다. 지층에는 최용신의 삶과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는 주제의 상설 전시실과 교육 영상실, 지상에는 어린이 체험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기념관이 있는 상록수공원 내에는 최용신 묘소(향토유적 제18호)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최용신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전시와 나라 사랑과 상록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교육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 시민과 함께 하는 상록수문화제, 학술 심포지엄, 추모 행사 등 기념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최용신을 모델로 한 심훈의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장편소설에 당선돼 세상에 더 알려지게 됐다.

이에 안산시는 지역의 대표 역사 인물인 최용신의 삶과 업적을 담은 도록 ‘최용신기념관 학술총서 4’를 발간했다. 발간된 도록은 최용신의 학술연구 성과 및 최용신기념관 개관 이래 수집한 주요 유물과 자료를 종합적으로 수록한 것으로 1995년 수여된 건국훈장 애족장을 비롯해 샘골강습소 낙성식(1933) 사진 등 모두 116점의 자료가 담겼다.

도록은 최용신의 일대기를 크게 4개 주제로 구성됐다. 시는 500부를 발간해 관내 학교 및 도서관, 전국 박물관 등 관계기관 등에 배포했으며, 스마트폰을 통해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도록 전자북(e-book) 서비스도 진행할 예정이다.

조규택 최용신기념관 학예연구사는 “농촌계몽운동가, 교육가,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최용신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며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을 알려주고 상록수 정신을 전 국민에게 알려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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