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세상은 도대체 누가 지도하고 계몽하는가. 생각해 보건대 ‘없다’는 답이 입가를 맴돈다. 혹여 어떤 의식 있는 자가 지도하고 계몽한다 해도 귀 기울이는 진실한 자가 없다. 오늘날의 풍요와 교만이 낳은 산물(産物)이라 하겠다.

그렇다 할지라도 깨달은 자가 있다면 그 깨달은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에게 깨달음을 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함께 나누고자 할 때는 받는 자가 주는 자를 물고 뜯는 것이 예가 되어 내려오고 있음을 인류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심지어 종교의 역사가 더 이를 실감나게 증명하고 있다. 기존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적 몸부림에서 나오는 결과다.

그래도 나누어야 한다. 하늘에는 해 달 별 구름 비 빛 등이 있으며, 이 땅에 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기도 있다. 그러나 하늘은 이 귀한 것들을 그 어떤 대가도 없이 우리에게 그냥 주고 있다. 이것이 하늘이 정한 원칙이라 한다면, 우리도 그러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구분 없이 모든 이에게 깨달은 것으로 은혜를 입혀서 다 잘되게 하는 것이 먼저 받은 자의 도리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하늘의 뜻이니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본다.

인류사이자 종교사엔 중세기독교가 천동설을 교리로 가지고 있을 당시 코페르니쿠스에 이어 지동설을 주장해 당시 종교와 심한 갈등을 빚으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갈릴레이가 있었고, 이천 년 전 하늘이 보낸 예수가 있었다.

또 이들에게 깨달음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 같은 하늘의 이치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을 것이다.

갈릴레이나 예수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정치 사회 종교가 부패와 타락의 극치를 달리던 때를 운명처럼 살아야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과 거짓과 비진리와 핍박이 판을 치고 또 하나 될 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진리를 외쳤으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 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며 당 시대를 꾸짖고 계몽했으니 참 지도자요 계몽가요 참 스승이었음이 틀림없지 않은가.

이처럼 이들은 당 시대의 위력(威力)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 시대의 현실을 책망했고 꼬집었던 것이다. 그런고로 당 시대의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아무런 연고 없이 시대의 선각자요 선지자요 참스승을 향해 돌을 던진 배은망덕한 시대의 이단아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정치 사회 종교는 이미 부정과 부패를 넘어 썩을 대로 썩어 있으니 더 이상 기대를 할 수 없게 됐다. 이럴 때 어둠을 비출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선각자(先覺者)요 참 스승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아니 벌써 큰 빛이 찾아와 암울한 세태를 책망하고 있으나 모두가 강퍅해서 그 책망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하늘의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하늘의 원칙이요 뜻을 받들어 아무런 조건 없이 지도하고 교훈하고 계몽하고 있지만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욕하고 때리고 죽이고 있으니 이 시대가 바로 인류의 종말이 아닌 우리의 영적 내면의 세계가 다 무너진 종말이요 말세며 분별력을 잃은 칠흑(漆黑)과 같은 밤인 것이다.

이때 하늘로서 내려 비추는 그 빛을 받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귀 있는 자가 있다면 들어줘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뜻도 아니요 하늘이 이 시대에 명하는 명령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는 경서의 말씀이 이 시대에 응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라는 말과 같이 이방이 먼저 이 큰 빛 가운데로 나아옴을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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