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아, 네월아~’ 세상사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일컬어 ‘강태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무슨 일을 더디고 느리게 하는 사람들에게 “강태공 세월 낚듯 한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다. 낚시꾼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대명사로 불리는 이 ‘강태공(姜太公)’은 실존 인물로 중국 주나라 초엽의 조신인 ‘태공망(太公望)’을 그의 성(姓)인 강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본명은 여상(呂尙)으로 은(殷)나라를 격파하고 제(齊)나라의 후(侯)로 봉해진 인물로 태공망이라는 명칭은 주나라 문왕(文王)이 웨이수이(渭水)강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선군(先君)인 태공(太公)이 오랫동안 바라던(望) 어진 인물이라고 여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헌데 어찌하여 어진 인물이자 주나라의 군대를 지휘한 인물로 추측되고 있는 강태공이 ‘한량’을 대표하는 단어로 그려지게 된 것인가.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을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탓도 있으리라 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사건이 되었든지 간에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일은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곳, 누구에게라도 있어지는 일이다. 강태공과 그의 부인에 얽힌 일화도 매한가지다.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달기란 여인에게 홀려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신의 말만 들으며 폭정을 일삼던 때, 선비 강태공은 책만 읽고 낚시를 소일거리로 삼았다. 당연히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대신 그의 부인이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 마 씨가 마당에 널어놓은 피를 가리키며 ‘비가 오거들랑 거둬 달라’고 부탁했지만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그에게 부인의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비가 오는지도, 곡식이 떠내려가는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는 강태공에 화가 난 부인이 “아무리 선비라지만 글만 보면 뭐할 것인가.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오”라며 신세를 한탄하더니 급기야 집을 나가고야 말았다.

세월이 흘러 폭군인 주왕으로 인해 나라의 국운도 쇠하여 위태해질 때 현명한 임금으로 소문난 주나라의 문왕이 강태공을 등용하게 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은나라 사직이 문을 닫고 새 시대인 주나라가 문을 열게 되었다.

새 시대를 열 때 크게 공훈을 세운 강태공이 큰 인물이 되어 거리를 지날 때에 그 소문을 들은 부인이 그 행렬 앞에 나와 자신을 봐달라고 하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태공은 부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떠오라고 시킨다. 부인이 부리나케 바가지에 물을 떠오자 태공은 그 물을 바닥에 버리고 다시 담아보라고 하였고, 그 물을 다시 담지 못하는 부인을 두고 태공은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는 말의 유래가 여기서 나지 않았는가 한다.

태공과 부인 마 씨의 이야기가 비단 그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작금의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까이는 현 종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봐도 그렇다.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자신들과는 맞지 않는다며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제대로 된 판단기준 없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강제개종교육을 일삼는 목사들을 소속 교단으로 두고도 아무런 반성도 회개도 없다.

그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신앙에 따라 생활하는 신앙인들이 인권유린을 당하는 데도 뒷짐만 지고 있는 것 또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기 때문이다.

2000년 전 예수가 이스라엘 땅에 왔을 때도 그러했다.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구약의 약속대로 온 예수를 ‘이단’이라 핍박하고 조롱했던 것처럼 말이다. 연한 순 같고 유리하는 사람같이 보인다는 성경의 묘사대로 당시 예수의 모습은 볼품 없었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는 말처럼 예수가 나고 자란 동네 또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이 두려워서, 출교 당할 것이 무서워서 혹은 당시 겉으로 보이는 예수의 모습과 출신이 마땅치 않아서 나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라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이들이었고, 경서에 기록된 말씀을 알기는 하나 믿고 깨닫지 못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핍박하던 무리였다. 오늘날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

종교 세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또한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고통과 이익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태공이 나라와 가족을 위해 당장의 고통과 이익은 잠시 접어둔 채 책에만 파묻혀 산 뜻을 부인 마 씨가 알았으면 집을 뛰쳐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고 내가 내 눈앞의 복을 차버렸구나”라고 후회해봤자 이미 부인 마 씨에게는 ‘엎질러진 물’이었을 뿐이다.

기독교의 경서 성경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비록 종교는 다르다 하더라도 모든 종교가 생명과 복을 위한 길을 택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 보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 더 큰 복을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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