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운대신사(최제우)가 득도한 경주 구미산 용담정 입구. ⓒ천지일보(뉴스천지)

천도교는 지금으로부터 151년 전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창도(創道)된 민족종교다. 초기에는 동학(東學)이라고 부르다가 1905년 12월 1일 의암 손병희 선생에 의해 천도교(天道敎)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도교는 내우외환의 위기의식이 팽배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다시 개벽해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창도됐다.

천도교는 민족종교의 맏형으로 사상적·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우리 국민 대다수는 천도교의 이런 업적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이에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와 그 종교적 기반을 견고히 다진 천도교의 스승 中 두 분을 중심으로 천도교를 소개한다.

▲ 수운대신사가 득도한 경주 용담정. ⓒ천지일보(뉴스천지)

◆제1세 교조 수운대신사 최제우, 창도
천도교의 제1세 교조는 수운대신사(최제우), 제2세 교조는 해월신사(최시형), 제3세 교조는 의암성사(손병희), 제4세 대도주 춘암상사(박인호)로 이어오고 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24년 10월 28일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며 그의 시조는 신라 말기 유명한 학자인 최치원 선생이다. 그의 부친 최옥은 문장과 인품이 높아 경상도 일대 사림(士林)의 사표(師表)가 됐다.

최제우 선생은 21세 때부터 도(道)를 얻고자 10년간 주유천하 했으나 정치의 부패와 사회제도의 모순만 뼈저리게 느꼈을 뿐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는 31세 되던 1855년 3월 어느 날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화창한 봄날 그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한 승려가 나타나 ‘소생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중이온데 백일기도를 마치는 날 탑 아래서 책한 권을 얻었는데 사방을 돌아다녀도 글의 뜻을 알 수 없어 이 책을 선생께 드리겠다’면서 사흘 후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사흘 후에 그 사람이 나타나자 최제우 선생이 ‘알았노라’고 하자 ‘선생은 참으로 하늘이 내린 분’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 책을 천도교에서는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른다.

이후 최제우 선생은 양산 천성산 내원암(內院庵), 또는 적멸굴(寂滅窟) 등지에서 49일 기도로 수행을 했고, 마침내는 고향인 경주 현곡면 구미산에 위치한 용담정(龍潭亭)에서 ‘사람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가 포덕 원년(1860년)인 경신년 4월 5일이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이 날을 천도교 원년(元年)으로 삼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로 기리고 있다.

최제우 선생은 득도를 한 이후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수행과 수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수행 기간을 거친 후 포덕 2년(1861년) 신유년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포덕(布德)을 시작했다. 포덕을 시작하자 어진 선비들이 풍운(風雲)같이 모여들어 입도했으며 최시형 선생도 이때 입도했다.

수운대신사는 1863년 8월 14일 해월신사에게 도통(道統)을 전수했으며 그 이듬해인 1864년 3월 10일 대구장대 관덕당 뜰에서 참형됐다. 참형 당시 형졸(망나니)이 몇 번 칼을 내리쳤으나 목에 아무런 흔적조차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모두가 놀라 어찌할 바 모르자 수운대신사는 ‘내 앞에 청수(淸水) 한 그릇을 갖다 놓으라’고 했고 그의 말대로 청수를 갖다놓자 청수 앞에서 심고를 한 후 참형을 받아 순도(殉道)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때 수운대신사의 나이는 41세였다. 수운대신사가 저술한 경전으로는 한문체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 가사체인 <용담유사>가 있다.

▲ 경주 황성공원 해월신사(최시형)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동학혁명
해월신사는 1827년 3월 21일 경주 황오리에서 태어났고 35세 때인 1861년 동학에 입도했으며 37세 때인 1863년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았다.

해월신사는 동학에 입도 후 70리 길을 멀다 않고 수시로 수운대신사가 있는 용담정을 찾아 도를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수운대신사 순도 후 태백산으로 피신했다가 그해 10월부터 안동 영양 정선 영월을 중심으로 교단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1880년 6월 인제 갑둔리에서 목판본 <동경대전>을 간행했고 이듬해 6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해월신사는 억울하게 순도한 수운대신사에 대한 신원운동을 1892년 공주‧삼례에서 전개했고 그 이듬해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광화문 복합상소를 올렸으며 보은에서 2만여 명이 20여 일간 척왜양(斥倭洋)운동을 전개했다.

해월신사의 중요법설에는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방법을 설한 ‘대인접물(待人接物)’과 살아있는 도(道)란 그 때에 따라 생활 속에서 훌륭하게 적용되고 또 활용돼야한다는 ‘용시용활(用時用活)’ 등이 있다.

또한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인 동학혁명이 1894년 3월 21일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가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백산에서 일어났다. 해월신사는 그해 9월 총기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동학혁명군은 정부‧일본군의 현대식 무기 앞에 패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월신사는 1897년 12월 24일 의암성사에게 도통을 전수했고 1898년 6월 2일 한성(경성)감옥(현 단성사 뒤편)에서 교수형을 당해 72세의 나이로 순도했다.

◆제3세 교조 의암성사 손병희, 3.1운동과 봉황각(鳳凰閣)
의암성사는 1861년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서 태어나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도했으며 1897년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았다. 그는 해월신사 순도 후 각지를 순회하면서 흩어진 교회조직을 재정비했으며1901년 3월 세계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에 머물면서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조희연 박영호 의친왕(이강공) 등 개화파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의암성사는 1904년 정부개혁과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했으며 1905년 12월 1일 동학의 은도(隱道)시대에서 벗어나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현도(顯道)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1906년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했다.

의암성사는 우리나라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앞으로 국권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뤄 놓으리라’고 말하고 그 이듬해 가을 우이동일대 땅 9만 2383m²(2만 7946평)을 매입하고 1912년 3월 7일 공사를 시작해 그해 6월19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봉황각이라 이름했다. 의암성사는 7년간 봉황각에 머물면서 독립투사 양성과 독립운동에 대한 구상을 하고 3.1운동을 앞두고 불교 기독교 대표와 함께 숙의했다.

그는 전국의 천도교 고위 교역자 483명을 뽑아 봉황각에서 49일씩 7회에 걸쳐 특별수련을 시켰다. 천도교가 3.1운동 당시 전국조직망을 가동해 일제히 궐기할 수 있었던 정신적 원동력은 이때의 수련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천도교 중앙총부는 독립자금을 마련키 위해 1918년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의했다. 모금이 시작되자 조선총독부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은행에 예금된 6만 6600원을 동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논밭과 황소 등을 팔아 성금을 냈다. 이렇게 해서 약 1백만 원(오늘날 100억, 쌀값 환산)의 거액이 모아졌고 그중 27만여 원을 건축비용으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 대부분의 성금은 3.1운동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과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당시 중앙총부에서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에 시달리자 교단 간부진이 의암성사에게 인쇄소 폐업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그는 ‘국가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일조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함이라. 내 생각한 바 있으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훗날 3.1운동 때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었던 것은 의암성사의 이러한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의암성사는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왜경에 체포됐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 대한민국의회정부‧대한민간정부‧조선민국정부 등 임시정부 세 곳에서 그를 국가수반으로 추대했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추진과정에서 옥중에 있는 의암성사를 국가수반으로 추대한 사실은 당시 민족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의암성사는 옥중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전신불수가 됐고 병세가 악화돼 늑막염까지 앓았으나 일제는 병보석을 허가치 않고 재판을 계속했다. 그는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병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 3.1운동의 산실 봉황각. ⓒ천지일보(뉴스천지)

◆천도교-민족종교의 장자
천도교의 제1교조 수운대신사는 미국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보다 3년 앞서 집안의 여종 두 사람을 해방시켜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또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다.

그 당시 시대 상황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또 그는 머슴살이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화전을 일구어 살던 해월신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이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그 중심을 보는 수운대신사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해월신사를 통해 종교지도자의 덕목이 학력이나 화려한 세상경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월신사는 수운대신사가 저술한 경전을 알기 쉽게 재해석해 대중화시켰다. 그는 이러한 법설(法說)을 통해 서민들과 공감대를 이룸으로써 동학의 저변 확대에 결정적인역할을 했다. 그의 법설 중 ‘이제부터는 일체 의식에 청수 한 그릇만 사용하라’는 ‘우상철폐’는 오늘날 허식(虛飾)이 팽배된 사회나 허례(虛禮)가 다반사인 종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암성사는 천도교가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면 자칫 천도교와 교인들에게 큰 어려움과 고통이 따를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와 의암성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교단과 교인의 영달을 버리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다. 또한 의암성사는 최린‧오세창‧권동진에게 3.1운동을 지시하면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 원칙을 정했다.

‘가장 세계화할 가능성이 높은 종교가 천도교’라고 전망한 종교학자가 있다. 이는 천도교의 사상이 모든 종교와 문화를 포용하며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천국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천도교는 명실공히 우리 민족종교의 장자다. 천도교가 민족종교의 장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 지구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힘차게 달리기를 기대해 본다.

▲ 임운길 교령. ⓒ천지일보(뉴스천지)
임운길 천도교 교령 인터뷰

정신개벽 수련운동 총력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

-천도교의 사상과 정신에 대해 설명한다면?
천도교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있다는 것을 믿고 한울님을 부모님같이 섬기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한다.

또한 마음을 닦는 수련을 함으로써 새 사람이 되고 수심정기(守心正氣), 성경신(誠敬信)을 체행해 천지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교시한다. 그리고 이신환성(以身換性)으로 정신개벽을 함으로써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자아완성, 도성덕립(道成德立)에 이르도록 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분단의 비운을 안고 장장 60여 년간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핵전쟁의 위협, 온갖 질병의 발생, 분열과 파쟁, 가난, 이상기온, 지진, 화산폭발, 태풍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 근원된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 따라서 천도교는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이신환성 정신개벽 수련운동과 포덕교화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천도교가 우리나라에 기여한 업적은?
천도교는 152년의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나라와 세상을 위해 수십만의 생명과 수많은 재산을 바쳐왔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한울이요, 따라서 사람을 한울같이 섬기자는 인간존중사상을 근간으로 민족자주정신 확립과 자유평등사상, 그리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사회의 실현을 위해 지속적으로 매진해 왔고 앞으로도 민족자주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대도(大道)의 목적 달성을 향해 중단 없는 전진을 할 것이다.

천도교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조선조 말엽과 일제 강점기에 동학혁명‧.1운동은 물론 갑진개화혁신운동,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운동(어린이 잡지 발행), 농민운동(조선농민사 설립, 조선농민 발행), 여성운동‧청년운동‧학생운동 등 신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종합잡지 <개벽>을 비롯한 출판문화운동, 노동운동 등도 주도했다.

이 외에도 항일 비밀결사 오심당(五心黨)운동, 멸왜기도운동, 8.15광복 후 남북분열저지운동 등을 벌였다.

-천도교의 앞으로의 계획은?
이신환성 정신개벽 49일 특별기도를 3년간 7차례 봉행할 계획이며 현재 제4차 봉행 중에 있다.

천도교는 ▲하계‧동계 수련 적극 추진 ▲교헌 개정 ▲종학대학원 교육을 통한 교역자 육성 ▲지방교구 발전을 위한 순회, 수련 강도회 추진 ▲인내천 강좌 적극 추진(국내외 동포) ▲환경운동 ▲민족자주평화통일 기반조성 ▲정양원 설립과 3.1운동백주년 사업(기념관 건립, 보성사 복원, 학술회의 등), 동학발상지 용담정 성역화 사업, 4월 5일 천일기념일의 국정 공휴일 제정 등을 추진해 인내천 사상이 온누리에 퍼져나갈 수 있는 초석을 다지고 이 일을 위해 모든 천도교인들이 힘을 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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