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국새 ‘대군주보’와 보면(寶面) (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8.24
보물 국새 ‘대군주보’와 보면(寶面) (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8.24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2년 전 미국에서 환수한 19세기 ‘국새(國璽) 대군주보’ 등 국새 4과가 보물로 지정됐다.

24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국새 대군주보’를 비롯해 1946년 일본에서 환수한 대한제국기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 등 4과를 보물로 지정했다. ‘국새 대군주보’ 등 4과는 모두 국내로 돌아온 환수문화재로서, 보물로서의 역사적 상징성과 조형성을 인정받았다.

먼저 ‘국새 대군주보(國璽 大君主寶)’는 1882년(고종 19년) 7월 1일 제작된 것이다. 높이 7.9㎝, 길이 12.7㎝ 크기로 은색의 거북이 모양 손잡이(귀뉴 龜鈕)와 도장 몸체(인판 印板)로 구성된 정사각형 형태의 인장이다. 보면(寶面)에는 구첩전(九疊篆)으로 대조선국의 대군주라는 의미를 지닌 ‘大君主寶(대군주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외교, 고위 관원 위임장, 사령장, 대군주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 등에 날인한 국새로, 2019년 12월 미국의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아 환수됐으며,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보물 국새 ‘제고지보’와 보면(寶面)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8.24
보물 국새 ‘제고지보’와 보면(寶面)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8.24

함께 지정된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는 모두 대한제국기(1897~1910)에 제작된 것으로,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진 6개월 후인 1911년 3월 약탈되어 일본 궁내청(宮內廳)으로 들어간 수모를 겪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궁내청에서 환수해 총무처(1940~1960년대 국무총리 소속 아래 설치됐던 중앙행정기관)에 인계한 후 1954년 6월 28일 총무처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인계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3과 중 시기가 가장 이른 ‘국새 제고지보(國璽 制誥之寶)’는 1897년 9월 19일 완성된 인장이다. ‘제고(制誥)’는 ‘황제의 명령’을 뜻하기 때문에 이 국새는 조선왕실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황제로 칭한 대한제국에서만 사용한 국새이다.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모습, 청동동이에 담긴 유물(왼쪽),뚜껑을 연 청동유개호와 유물이 담긴 모습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8.24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모습, 청동동이에 담긴 유물(왼쪽),뚜껑을 연 청동유개호와 유물이 담긴 모습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8.24

‘국새 칙명지보(國璽 勅命之寶)’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서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대한제국 국새 10과 중 하나로, 1898년 윤3월 19일에 제작됐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국새를 제작했고 그 결과 1897년 9월 17일~19일 동안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 ‘명헌태후지보(明憲太后之寶)’ ‘황후지보(皇后之寶)’ ‘황태자보(皇太子寶)’ ‘황태자비지보(皇太子妃之寶)’ 10과를 완성했다.

‘국새 대원수보(國璽 大元帥寶)’는 1899년(광무 3) 6월 22일 대한제국이 육해군을 통솔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원수지보(元帥之寶)’ 1과, ‘원수부인(元帥府印)’ 1과를 만든 것 중 하나이다. 대원수(大元帥)는 원수부의 우두머리로, 국가의 전군(全軍)을 통솔하는 최고 계급을 지칭한다. 군인 임명서 등에 날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또한 고려 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을 비롯해 조선 초기 음식조리서인 ‘수운잡방’, 불경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 등 총 7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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