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not caption

우리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강한 자의 갑질이 계속되고 있다. 직장뿐만 아니라 일상 주거지내의 아파트입주자대표나 주민들이 관리사무소 인력이나 경비원 등에 대한 갑질이 상례화되는 가운데 국회 건설교통위원회에서는 아파트 입주자들이나 대표들의 갑질 행위를 근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공동주택관리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아파트에서 발생되는 갑질이 줄어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사업자대표나 가족에 의해 종업원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다반사이다. 시민단체가 발표한 조사내용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 근무자 중 36%가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갑(甲)질이라. 이 용어는 2013년 이후 대한민국 인터넷에 등장한 신조어이다. 그 뜻은 계약 권리상 쌍방을 뜻하는 갑을(甲乙)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갑’에 특정 행동을 폄하해 일컫는 ‘~질’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진바, 그 계기는 2014년 12월 발생된 대한항공 086편 회항 사건이었다. 이 갑질 사건으로 인해 미국 등 여러나라에서는 그곳에서도 갑질이 없을까마는 ‘한국의 갑질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가 많았다.

이 사건들을 접하고, 그 이후 우리사회에서 근절되지 않고 있는 갑질 행태를 대하면서 그렇다면 과연 을(乙)질은 없을까? 생각해봤는데, 궁금해 사전을 찾아보니 그 정의(定義)가 있었다. ‘을질이란 권리 관계에서는 약자이지만 을이 갑을 호령하거나 자신의 방침에 따르게 하는 짓 등 갑에게 횡포를 부림’ 이라 나와 있다. 생소한 용어이긴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갑질이 있으면 을질도 있는 법이니 얼마 전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을질이 실감났다.

들은 이야기지만, 지인은 서귀포 위미(爲美)에서 호텔업을 하고 있는데 여러 사업을 해봤지만 호텔업은 처음이라서 자신(갑)이 호텔운영전문회사(을)와 위탁운영계약을 맺고 진행해왔다는 것이다. 2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전모를 다 알았는데, 실상을 알고 보니 을에서는 계약조건을 빌미로 달랑 파견 직원 1명만 보내서 갑 소속 직원 20여명을 호령하고 또 계약내용에 돼 있는 협의마저 하지 않는 등 횡포가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가운데도 을은 계약내용을 빌미삼아 매달 운영비 등 명목으로 2년간 약 14억 3382만 341원(브랜드비, 부가세 포함)을 가져갔다는 것이고, 을 소속 파견 직원의 사실상 인건비인 용역비 명목으로 분기별로 3천만원을 떼어가면서, 현지에 근무조차 하지 않은 파견 직원 1명에 대한 인건비도 챙겼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무노동 무보수’. 계약서에 용역비(2인) 3천만원이라 돼 있으니 그 돈을 빼내갔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근무하지 아니한 1년간 가져간 1인 인건비 지급액 6천만원은 을이 취한 부당이익인 셈이다. 관련법과 객관적 사실에 비춰 봐도 을이 한 행위들이 과연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내용대로라면 을질도 갑질 못지않게 상당하다. 을이 우리나라의 호텔 운영 전문업체랍시고 경험이 없는 지방의 호텔 사업자를 울리고 횡포 부렸던 것이다.

을이 위탁운영계약을 ‘전가(傳家)의 보도’처럼 내세우며 을질은 계속됐다고 한다. 그래서 지인측에서 갑을양자간 신뢰가 무너졌기에 계약위반을 사유로 계약해지통지 했고, 이 계약해지는 민법 제111조 제1항 규정에 따라 6월 6일자로 효력이 발생됐다. 그럼에도 을에서는 ‘일방적인 계약해지는 불가하다’는 등의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 갑을 간 위탁운영계약은 민법상 위임계약이다. 민법 제689조 제1항에서 ‘위임계약은 각 당사자가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 당사자에게는 계약해지 자유권이 있는 것이다. 위임계약해지에 있어 위임의 기간을 정했는지 여부와 위임 비용을 약정했는지 여부는 관계가 없다. 그게 민법의 취지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판례도 있다. ‘민법상의 위임계약은 그것이 유상계약이든 무상계약이든 당사자 쌍방의 특별한 대인적 신뢰관계를 기초로 하는 위임계약의 본질상 각 당사자는 언제든지 이를 해지할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상대방이 손해를 입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배상할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이며, 다만 상대방이 불리한 시기에 해지한 때에는 그 해지가 부득이한 사유에 의한 것이 아닌 한 그로 인한 손해를 배상해야 하나, 그 배상의 범위는 위임이 해지됐다는 사실로부터 생기는 손해가 아니라 적당한 시기에 해지되었더라면 입지 아니했을 손해에 한한다(대법원 2000. 6. 9. 선고 64202 판결)’. 이 판례에서나 민법 제689조 제1항을 봐도 갑의 해약해지는 법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자유권이다. 이미 계약 해지 효과가 발생한 것임에도, 을이 무엇이 아쉬웠던지 수통의 내용증명 등을 보내며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하니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따로 없다. ‘을(乙)짓’을 해도 정도껏 해야 되는 게 아닐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