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강은영 기자] 권이종 박사는 1964년 10월 5일 독일로 떠난 후 3년간 파독광부의 일을 했던 영화 ‘국제시장’ 스토리의 실제주인공이다. 그는 광부일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서 13년간 더 머무르면서 교육학 박사를 따내 청소년운동과 교육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 그가 당시를 떠올리며 웃고 있다. ⓒ천지일보 2021.5.26
[사진=강은영 기자] 권이종 박사는 1964년 10월 5일 독일로 떠난 후 3년간 파독광부의 일을 했던 영화 ‘국제시장’ 스토리의 실제주인공이다. 그는 광부일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서 13년간 더 머무르면서 교육학 박사를 따내 청소년운동과 교육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 그가 당시를 떠올리며 웃고 있다. ⓒ천지일보 2021.5.26

영화‘국제시장’스토리 실제주인공 

가난 벗어나려 파독광부 지원… 바위 깔려 죽음 문턱 가기도

獨수양어머니 만류에 귀국 미루고 공부, 독일서 교수 꿈 성취

후세에 파독 광부·간호사 알리고자 파독근로자기념관 세워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2014년 12월 중순 개봉해 1426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 ‘국제시장’.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많은 중년 아버지들이 이 영화를 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영화 ‘국제시장’을 더 특별하게 마주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토리의 실제 인물인 권이종(81)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다. 그는 해보라대안학교 이사장, 한국파독광부협회 부회장, 파독근로자기념관 초대 관장, 한국청소년개발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파독광부 시절부터 독일에서 교육학 박사가 되고, 나눔과 봉사의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재정리한 자서전 ‘파독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를 지난달 초 출간했다.

권이종 교수는 전북 장수군 지리산 산골 한 오지마을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나 굶은 날이 부지기수였던 가난한 소년으로 자랐고, 파독 광부가 돼 3년간의 광부의 일을 마치고 독일에 16년간 머무르며 교육학 박사가 된 인물이다. 곧 대한민국이 전쟁폐허로 인해 가난한 시절 막장광부로 독일에 왔으나 꿈을 캐는 교수가 돼 삶이 바뀐 인물인 것이다.

1960년대 당시 독일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간 한국인이 2만여명 됐는데, 권 교수는 그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자타공인 인정되고 있는 이다. 그는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3년간 일한 후 독일 아헨 공대 교원대학에서 학사, 석사 및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에서 최초로 한글학교를 설립하는 등 16년간 청소년운동에 힘을 기울이다가 한국에 귀국해서도 청소년운동과 교육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

독일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파독광부로 일할 당시 보호장비 등을 착용한 권이종 교수의 모습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독일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파독광부로 일할 당시 보호장비 등을 착용한 권이종 박사의 모습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영화 ‘국제시장’ 스토리에 담기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흘린 땀방울과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로 한강의 기적 곧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업적들을 후세에 영원히 기억되게끔 하고 싶었던 그는 앞장서서 기념관을 추진했고, 그 결과 2013년 5월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파독근로자기념관을 개관하게 된다. 그곳에서 바로 영화 ‘국제시장’의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스토리가 완성되는데, 영화 스텝들이 기념관에 왔다가 초대관장이었던 권 교수를 만난 것이다. 스텝들이 그에게 “영화에 파독광부 이야기를 넣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에 권 교수는 2012년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 ‘막장 광부 교수다 되다’라는 책을 참고하라고 건네주게 된다.

영화 스텝들이 그의 자서전을 참고로 해서 영화 속에 파독광부의 삶이 생생하게 재연된 것이다. 영화 속 덕수(황정민 역)와 영자(김윤진 역)가 머나먼 타국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것처럼 권 교수의 아내가 파독 간호사 출신이다. 약간 과장된 것도 있지만 그의 독일 파독광부 시절을 중심으로 영화 내용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집이 가난해 중·고등학교를 겨우 졸업 한 후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냈기에 곧바로 입대했고, 제대 후에도 할 수 있는 것은 농사밖에 없어 농사를 지내며 평범하게 살았다.

결혼 당시 권이종 박사와 파독 간호사였던 아내 백정신씨 모습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결혼 당시 권이종 박사와 파독 간호사였던 아내 백정신씨 모습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가난 벗어나게 되는 운명의 순간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에게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바로 파독광부 모집광고를 알게 된 것.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었던 그에게 서울에 있는 오촌 여조카가 “서울 공사판에서 사람을 많이 뽑는다고 올라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고, 그는 농사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상경해 공사판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그 현장에서 알게 된 동료가 한양대 공대생이었는데, ‘파독광부 모집’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함께 독일에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파독광부는 1963년 12월 1진이 파견됐고, 그는 2진 모집에 지원했는데 수천명이 몰렸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영화에서처럼 60㎏짜리 쌀가마니를 머리 위로 드는 장면이 나온 것처럼 당시에도 똑같았다고 한다. 기본적인 신체검사와 달리기, 모래가마니 어깨 위로 들기 등의 체력검사에 통과해야 했고, 영어·국사 과목 필기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권 교수는 이를 다 합격했으나 마지막 남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돈이었다. 독일까지 가는 기본준비 경비가 있어야 했는데, 그는 이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고, 농사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던 그의 형은 전 재산인 소 한 마리와 보리 열다섯 가마를 팔아서 독일에 갈 경비를 대줬다. 동생을 위해 기꺼이 전 재산에 가까운 큰 비용을 대준 형이 있었기에 지금의 권 교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그는 1964년 10월 5일 독일로 떠나는 날 형님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꼭 많은 돈을 벌어오겠다’고 다짐하며 독일로 떠났다. 독일에 도착한 순간 그는 그저 독일의 모든 모습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파독광부 시절 동료와 함께 찍은 모습. 맨 왼쪽이 권이종 박사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파독광부 시절 동료와 함께 찍은 모습. 맨 왼쪽이 권이종 박사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목숨 건 파독 막장광부의 삶

독일 탄광 안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모두가 ‘클뤽 아우프(행운을 가지고 위로 올라오라)’로 인사를 했다. 탄광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위험한 일이었고, 무사히 끝내고 올라오라는 뜻에서 행운을 비는 인사였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그대로 재연됐고, 그는 영화에서 탄광 막장광부의 일하는 장면들이 자신이 실제 일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흡사하게 잘 재연됐다고 말했다.

광부의 일은 말로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고됐다고 한다. 지하에 내려갈수록 온도가 올라가 더워서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속옷만 입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석탄가루가 코와 입에 들어가지 않게 보호하는 마스크가 있지만 더워서 쓰지 못할 정도라 숨을 쉴 때마다 석탄가루와 돌가루가 몸속 모든 곳으로 들어온다. 이를 빼내기 위해 고춧가루보다 더 매운 코담배를 코로 들이마시면 콧속을 자극해 그때 석탄가루가 콧물과 함께 다시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런 행위를 매일 수차례 해야 하는 것도 탄광일과 별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들은 군대 시절 대부분 화생방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알 것이다. 군 제대할 때까지 매일 수차례 화생방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아마도 치를 떨지 않을까싶다.

광부의 일은 육체도 고됐지만 죽음까지 이르게 되는 사고도 끊이지 않아 두려운 직업이었다. 권 교수는 파독광부 시절 가스폭발, 매몰, 기계에 손가락이나 다리가 절단되는 등의 사고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그가 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천장붕괴 사고로 친한 동료까지 잃게 되면서 그 역시 언제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순간 두려움과 외로움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도 실제 큰 사고를 당했다. 일하던 도중 머리 위에 집덩이만한 바위가 떨어지는 것까진 봤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손이 잘려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눈이 감겼다. 그대로 죽는 건가 싶어 그는 가족들의 얼굴과 고향을 떠올리며 눈이 감겼는데,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광부 전용병원에서 수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한 달간 병상에서 보내며 손을 잘라야 할까봐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 뼈와 신경에 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다만 지금도 다친 왼손은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권 교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탄광 안의 막장 채탄 기계 모습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탄광 안의 막장 채탄 기계 모습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광부에서 교수가 된 사연은

그는 퇴원 후 광산에 복귀했고, 독일인 감독관이 그래도 그를 불쌍하게 봤는지 회복될 때까지 수월한 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만큼 독일인 감독관은 외국인에게도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를 해줬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근로현장이 본받아야 할 대목이라고 권 교수는 말했다.

독일에서 광부 고용계약 3년이 끝나고 대다수가 귀국했고, 그도 귀국을 위해 모든 짐을 미리 고향에 보냈다. 비행기표까지 끊어서 공항까지 와서 비행기를 타려는 순간 그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수양어머니로 모셨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인 로즈마리 여사가 그를 붙잡은 것. 우연히 동료 광부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늘 다정하게 대해주자 고마움에 양어머니로 모시며 가족같이 지냈는데 그가 귀국하려고 하자 공항까지 와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던 것이다. 권 교수는 “수양어머니가 ‘광부 일만 하고 돌아가기 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냐’며 독일에서 공부하라고 붙잡으며 나를 비행기에서 끌어내렸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고마워했다.

독일에서 수양어머니로 모셨던 로즈마리 여사와 함께 찍은 모습. 로즈마리 여사는 3년간의 파독광부 일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권 박사를 붙잡아 교육학 박사가 되도록 이끌어준 이다.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독일에서 수양어머니로 모셨던 로즈마리 여사와 함께 찍은 모습. 로즈마리 여사는 3년간의 파독광부 일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권 박사를 붙잡아 교육학 박사가 되도록 이끌어준 이다. (제공: 권이종) ⓒ천지일보 2021.5.26

어릴 적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그는 열심히 공부한 끝에 사범대학(아헨교원대학교)에 입학했는데 해당 대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최초로 외국인 학생으로서 입학했다고 한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호텔 등에서 알바하면서 박사학위를 따냈고, 평생을 고학으로 꿈을 이뤄냈다. 독일에서 평생교육과 청소년 분야를 전공한 뒤 16년간의 생활을 끝내고 1979년 귀국한 그는 한국 교육에 접목해 국내 평생교육원과 청소년 교육환경을 바꾸는 데도 기여하고 헌신하게 된다.

 
[천지일보=강은영 기자] 권이종 박사가 천지일보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으며 파독광부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1.5.26
[천지일보=강은영 기자] 권이종 박사가 천지일보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으며 파독광부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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