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송범석 기자] 기대도 절망도 품을 수 없는 한 여인의 처절한 삶의 파편들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작품이다. 지난 2009년 동인문학상에 <나쁜 피>를 올려 큰 주목을 받았던 소설가 김이설은 특유의 간결하고 긴장감 넘치는 문체를 새 작품 <환영>에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문장은 어지간해선 한 줄을 넘기지 않는다. 극도로 감정이 절제된 문장 속에서 처연함의 물결이 쏟아져 내린다.

작품 속 주인공 윤영은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답시고 놀고먹는 무능력한 남편과 갓 태어난 젖먹이의 생계를 책임진다.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며 거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젖먹이 때문에 몸을 내던지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그렇게 윤영은 매일매일 자신을 죽여가면서 점점 타락의 길을 걷게 되고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낸다.

지독한 현실이지만 윤영에게 피안의 섬은 없다. 도망치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그녀가 기대야 할 모든 것이었다. 연못가가 딸린 닭백숙집에서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일하고 난 그녀가 쥐게 되는 것은 얼마의 푼돈과 고통의 시간뿐이었다.

잘 걷지 못 하는 갓난아이도, 그녀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싹싹 빌어대는 멍청한 남편도, 도박 빚으로 결국 세상을 떠난 여동생도, 자신의 명의로 일을 벌인 남동생도 그녀가 끌어안아야 할 삶이었다. 윤영은 구차한 희망은 꿈꾸지 않는다. 아비도 모를 둘째 아이를 산부인과에서 ‘죽이고’ 난 그녀는 단지 ‘살고’ 싶다는 말만 되뇔 뿐이다.

“온몸에 한기가 스몄다. 그래도 자꾸 웃음이 났다. 심란했던 혹을 떼어낸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았다. 남편도 일을 시작한 것이다. 나도 다시 돈을 벌고, 아이도 치료를 시작할 것이다. 남편이 공무원이 되지 않아도, 수입이 적어도 괜찮다. 제대로 살수만 있다면, 사람처럼 살 수만 있다면야.”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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