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 이야기다.
“이놈아, 까마귀가 보면 ‘할배’라고 하겠다.”

겨울철이 되면 선생님은 곧잘 나를 보고 이런 지적을 했다. 시커멓게 때가 끼어 부르튼 손 때문이었다. 물론 내 손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한 아이들은 거의가 내 비슷한 꼴이었지만, 욕은 언제나 내가 대표로 얻어먹었다. 그 이유는 어쩌면 공부만은 내가 제일 잘했던 탓일 수도 있었다.

좌우지간 까마귀 할배 소리를 들을 적마다 나는 꼭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특히 옥희 앞에서 이런 창피를 당하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옥희는 성냥공장 집 딸로 3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다. 그녀의 집은 읍내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얼굴도 깜찍했지만 손이 너무 하얗고 예뻐 언제나 나의 눈을 부시게 했다. ‘천사의 손’이 있다면 아마 저럴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즈음 나는 옥희와 ‘신랑 각시’가 되는 꿈을 종종 꾸곤 했는데, 그만큼 나는 당시 그녀의 손만 보면 현기증을 느꼈고 더불어 이상한 흥분마저 일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훗날 내가 나이가 들어서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성을 만나면 우선 손부터 살펴보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다. 손이 희고 예쁘지 않은 여자는 비록 얼굴이 반반할지라도 나는 별로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하여튼 나의 천사였던 옥희는 유학을 가 중학교부터는 서울에서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도 대도시로 나갔다. 친척의 소개로 그 나이에 벌써 일자리를 구해. 고향은 나에게 있어 ‘따뜻하고 정겨운 그 무엇’이 아니었다. 갈라지고 부르튼 내 손처럼 고향은 ‘희망이 없는 가난’ 그 자체였다. ‘공돌이’가 되기 위해 기꺼이 집을 등진 건 고향에 아무런 미련도 없거니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야간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명절에조차 나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 그만큼 차라리 고향을 잊으려고 했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옥희는 아니었다. 그녀만은 결코 잊어본 적이 없었다. 특히 그 희고 예쁜 손은 말이다. 주경야독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나의 머릿속에는 옥희의 천사 같은 손이 뜬금없이 생각나곤 했던 것이다.

옥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건 오히려 내가 나름으로 성공을 하고서였다. 일찍부터 공장 밑바닥 생활을 몸소 겪은 나는 경제개발에 따른 고속성장이 이어지자 호기를 잡게 되었다.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로서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던 나는 독립하여 부품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몇 차례 호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 종업원을 500여 명이나 둔 탄탄한 중소기업의 오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