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보스턴 주재기자 

자, 그럼 미국의 육포 맛은 우리나라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 필자가 어릴 때는 육포를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그저 어른들을 따라 어떤 행사에 가면 고기 말린 것으로 보이는 벌건 종이 같은 것에 견과류 고명이 올려 있는 음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딱딱한 몇 조각의 잘게 썰어진 육포 맛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워낙 고기를 싫어하던 체질이라 아예 관심도 없었기에 나이 들어서도 별로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육포를 대량 생산하는 미국에 와서야 육포 맛을 처음 알게 됐다.

육포는 그 종류가 다양한 만큼이나 조리법도 다양하고, 그 맛도 향도 각각 다양하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그 나라마다 기호대로 양념을 다르게 하기 때문에 저마다 양념 섞인 육포의 특유한 향이 모두 다르다.

그 이름도 모두 다양하고 달라서 생고기에 소금 간을 해서 그대로 말린 오리지널 맛, 버팔로 맛, 데리야끼 맛, 소금 후추 맛, 달고 매운맛 등 양념의 이름을 붙이기 나름이다. 연하기도 모두가 다른데 어떤 것은 너무 질기고 딱딱해서 턱이 다 부러질 것 같은 것도 있어서 딱딱한 게 싫은 사람이라면 양념이 좀 많이 된 부드러운 것으로 잘 골라 사서 먹어야 한다.

미국의 육포 맛은 한국의 것에 비해 두껍고 질기며 부드럽기 보단 입에서 좀 텁텁한 맛인데, 아무래도 고기의 순 맛이 우리의 고기 맛과 다를 것이고, 양념의 차이, 그리고 만들어지는 방식이 달라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선 한국의 육포는 대부분 엄청난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식품인데 비해 미국의 육포는 거의 기계로 뽑아내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다르다. 미국은 땅 덩어리가 워낙 넓은 만큼 소도 많고 육포도 당연히 많이 생산되므로, 여기선 이것이 귀한 음식이 아닌 남녀노소 모두 쉽게 즐길 수 있는 흔한 간식거리이다.

미국 육포의 유래는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왔다 하는데 그들이 들소고기를 저장식품으로 만들어 먹던 것이 오늘날의 비프 저키(beef jerky)라고 불리는 음식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키라는 말은 원래 잉카의 언어인 차키(Ch’arki)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말린 고기’라는 의미다. 이것이 북미에서 저키로 불리기 시작했다. 저키는 최초로 인간이 만들어낸 생산품 중 하나로 생존을 위한 중요한 음식 저장 기술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유럽의 개척자들이 ‘아메리카’란 땅에 도착해서 살아남기 위해 인디언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이 육포를 만드는 일이었던 것인데, 고기를 자르고 양념을 하고 그것을 말려서 저장해서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게 만들어서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이 알게 되면서, 결국 인디언들이 알려준 이 생존방법을 유럽인들은 역으로 이용해 아메리카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음식하나가 이렇게 세계를 제패하는 기술 내지는 무기가 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음식의 도움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제국의 예를 하나 더 들어 볼까한다.

우리에게는 더 가깝게 느껴지는 몽고. 이 몽고에도 육포 문화가 있었다. 이 육포는 어떻게 쓰여졌을까? 세계를 점령하고자 했던 칭기즈칸의 몽골 기마군단이 멀리 서아시아와 유럽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말 달리는 속도와 기동성이었는데, 이 기동성도 배가 고프면 불가능한 법. 이 기동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 바로 이 몽골 군사들의 비상식량인 보르츠(Borcha)라는 ‘육포̓였던 것이다.

이 육포는 소 한 마리 분의 고기를 총 3~4kg의 무게가 될 수 있게 잘 말려, 몽골 군사들이 휴대할 수 있는 전투식량으로 제공됐다. 군사들이 이 육표를 물과 함께 조금씩 풀어 마시고 또 달리고 했다고 하니, 세계를 제패하는 데에도 먹는 지혜가 이렇게 큰 역할을 담당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쟁에서도 배가 고픈데 먹는 것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으면 어떻게 제대로 싸울 수가 있겠는가? 건빵을 먹고 물을 마셔 배를 불리는 우리나라 군대의 모습과 조금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포를 먹을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시간이 지나면 배에서 불어나는 것을 잊고, 맛있다고 너무 한꺼번에 많이 먹게 되면 위장 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너무 많이 씹게 되면 턱이 빠질 위험도 피할 수 없으니, 요새 연한 음식만을 골라먹는 현대인들에게는 주의할 사항들이 될 수 있다.

“너는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필자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께 받았다는 이 짧은 질문이 오늘날 필자로 하여금 육포를 뜯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이 되고 있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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