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여학교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선교사의 韓 사랑 “교육 ㆍ 나라독립엔 남녀평등”

[천지일보=김미정 시민기자] 한국 기독교 역사와 근대화의 관계는 깊다. 복음을 전하고자 들어온 선교사들이 다양한 선진기술을 보급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학교와 병원과 같은 기관이 전국에 세워지고 서양 문물이 들어왔다.

목포 정명여학교(현 정명여자중학교)는 1903년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설립, 9월 15일 개교했다. 초대교장 스트래퍼(Fredrica E. Straeffer)는 1899년 목포 선교부로 왔다.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전도한 스트래퍼 선교사를 통해 교회엔 주일학교가 생겼다. 아울러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모이는 주간학교(Day School)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것이 전남 최초의 여학교가 세워지는 계기가 됐다.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1903년 유진 벨(Eugene Bell) 목사는 남학생들을 따로 모아 자신의 사랑채에서, 스트래퍼 선교사는 유진 벨 목사의 문간채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이 둘은 남녀를 구별한 학교를 만들기로 선교본부와 결정 이듬해 10월 28일 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11월 3일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각각 개교하게 된다.

이후 1904년 3월 스트래퍼 선교사가 사임한 후 약 2년간 학교는 휴교한다. 2년 후 프래스탄 여사(Mrs. John F. Prestan)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학교의 체계를 갖춘다.

4대 교장인 마틴(Miss J. A. Martin) 선교사는 8000원의 건축비를 만들어 약 347.11m2(105평)의 석조건물 2층의 신축공사를 시작해 1908년 1월 준공한다.

1914년 6월 보통과 4년, 고등과 4년제의 사립 목포정명여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었다. 학교 이름 앞에 공·사립을 표기한 것은 정통성을 관(官)에 두고자 하는 당시 일본의 풍토다. 일제는 자신들이 세운 학교라는 것에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강제로 표시했다.

정명여학교는 1919년 목포 독립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 증거로는 현재 정명여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선교사 사택에서 1983년 2월 14일 건물의 천장을 뜯어내던 중 2층 문설주 위 천장 귀퉁이에서 문서더미가 발견된 것을 꼽을 수 있다.

문서더미는 붓으로 적은 김목사전(金牧師殿)이다. 3.1운동 당시 사용했던 3.1운동 선언서의 우송봉투였다. 이것이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는 5종의 문서다.

5종의 문서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인쇄본 1통, 동경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8독립선언서’ 인쇄본 1통, ‘조선독립광주신문’이라는 제하의 인쇄물(지하신문) 1본, “경고아이천만동포”(2000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로 시작하는 격문 1매, 거칠게 손으로 적은 듯이 보이는 독립가 사본 1매다.

1919년 4월 8일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과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학생 등을 포함한 150여 명이 거리로 뛰어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는 일본인 교장에 의해 민족운동이 억압된 반면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된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의 경우는 일본의 간섭이 적어 만세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명여학교 박금엽 동문은 3.1운동 당시 고등과 2년이었으나 만세운동으로 학교가 휴교돼 졸업장을 받지 못했고 남편 양병진 씨는 3.1운동 당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해로 갔으나 약혼자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투옥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937년 9월 2일 일본은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정명학교는 신사참배 강요가 없어지지 않는 한 학교 운영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뒤 폐교하기에 이른다.

나라 잃은 슬픔과 겨레의 뼈아픈 쓰라림을 겪어온 정명여학교는 현재 당시의 교육용 건물이 거의 없어지고 선교사 사택으로 쓰였던 석조 건물 2동만이 남아있다.

등록문화재 62호로 지정된 선교사 사택은 1층은 음악실로 2층은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학교 입구에는 나라를 스스로 찾으려했던 선조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알리기 위한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정명여학교는 영화 <클래식>의 촬영장이기도 했으며 소설가 박화성의 모교이기도 하다.

▲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등록문화재 62호 선교사 사택 ⓒ천지일보(뉴스천지)

▲ 독립기념비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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