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신화가 생각났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올림포스의 신 아폴론은 활을 잘 쏘았다. 아프로디테 즉 비너스의 아들 에로스도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맞기만 하면 사랑의 감정에 활활 타오르는 화살을 쏘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요즘도 사랑에 빠지면 큐피드의 화살에 맞았다고 한다.

큐피드가 곧 에로스다. 에로틱하다는 것이 에로스에서 나온 말이니, 사랑이란 곧 관능이란 말.
하여튼 그러했는데, 아폴론이 보기에 에로스의 활이 우습고 같잖았다. 활 같지도 않은 활이라고 대놓고 비웃자, 에로스는 화가 났고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복수를 결심한 에로스가 두 개의 화살을 꺼내 들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에로스의 화살 중 하나는 맞기만 하면 바로 사랑에 홀라당 빠져버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화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빼앗아버리는 끔찍한 화살이다.

에로스가 한 쪽 눈을 찡긋 감고 아폴론의 심장을 겨누었다. 팽팽하게 늘어진 시위가 튕기자 화살이 그야말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에로스의 화살이 빗나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없다. 그러하므로 이번에도 에로스의 화살은 정확하게 아폴론의 심장에 꽂혔다.

돌연 아폴론의 눈이 뒤집어졌다.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상대는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 다프네. 다프네를 보는 순간 온 몸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것이 욕정인지 무엇인지 아무튼 가슴이 제 멋대로 벌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다프네 역시 에로스의 화살 한 방을 맞고 말았으니,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사랑을 빼앗아 가버리는 화살이었다. 그래, 다프네는 남자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걸 알 턱이 없는 아폴론이 다프네를 덮치려 했다.

욕정이든 무엇이든 아무튼 아폴론은 다프네를 품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프네는 어머나 하며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날 잡아 봐라” 하며 여자가 앞서고 남자가 허우적거리며 뒤를 쫓는 유치찬란한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죽기 살기였다.

그러나 사랑에 눈 먼 아폴론의 발걸음도 예사가 아니어서 마침내 다프네의 옷깃을 잡아 당기게 되었고, 다프네는 심장이 터질 듯 두려움에 떨었다. 다프네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버지 절 좀 살려주세요. 아름다운 저를 하나도 아름답지 않게 해 주세요!”

강의 신은 딸의 간절한 소원을 얼른 들어 주었다. 이 아버지의 묘수란 게 딸을 나무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달리던 다프네의 발이 땅속으로 빨려들며 뿌리가 되고 아름다운 에스 라인 몸은 기둥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고 온 몸에서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폴론이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으나, 소용없었다. 사랑은 늘 그 모양이다. 아무튼 아폴론은 다프네가 변하여 된 나무를 월계수라 이름 짓고 금빛 찬란한 왕관을 벗어던지고 대신 월계수 가지로 엮은 관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다프네는 승리 혹은 영광을 뜻하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월계관을 씌어주는 게 다 그 뜻이다. 아폴론은 원래 음악의 신이어서 그를 표현할 때, 손에 하프가 들려있고 머리에는 월계관이 씌어져 있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불현듯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12일 밤 대구스타디움에서 이 이야기속의 주인공들을 만난 듯 황홀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날 밤 대구세계육상경기대회가 열렸고, 세계에서 모인 멋진 청춘들의 아름다운 레이스를 보았던 것인데, 트랙 위를 질주하는 모든 청춘들이 다 아폴론과 다프네였다.

이야기란 게 꾸며낸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실 속에서도 이야기 못지않은 멋진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걸, 또 느끼게 된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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