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상으로

권지숙(1949 -  )

백지 위에 나를 뉜다

세상을 피해 무거운 산 하나 그 뒤에 그린다

사람은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넓고 긴 강을 붓 가는 대로 휘둘러친다

비바람 가릴 초가로 나를 가두고 문을 닫는다

그곳에서 석 달 열흘만 울겠다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순수한 시각 형상에 의하여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흔히 비구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비구상의 그림 속에는 구체적인 사물도, 또 사람도 그려져 있지를 않다. 다만 자유로운 선과 색채만이 자리한다.
때로는 이러한 비구상 마냥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백지 위에 자신을 눕히고 자유로운 붓 가는대로, 그대로 휘둘러 쳐지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을 피해, 사람들을 피해, 무거운 산 하나’ 배경으로 지니고, ‘비바람 겨우 가릴 허름한 초가에서, 문 굳게 닫고’, 말 그대로 구상이 아닌 비구상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스스로를 밀폐시킨 ‘그곳에서 석 달 열흘’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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